술을 마신다.

이 행위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시간적인 이유로,

공간적인 이유로 이 술을 먹는 테이블엔 나 혼자다.

그리고 테이블 외에 과거의 기억이 서려있는 음악이 있다.


나는 언제나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사람이다.

항상 부끄럽게 여러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할 수 있는 것과 그럴만한 사람의 행동인가는 다른 말이다.

난 항상 부끄럽고 미안하고 해서는 안될 짓을 한 어떤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먼저 다가가지 않겠다.

먼저 보고 싶고 그립다고 하지 않겠다.

적어도 나 하나의 마음으로, 감정으로, 욕심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안된다.

어떤 사람이 볼 때 나는 갖은 사람일 것이고, 운이나 어떤 힘이 받혀주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분명 나의 넋두리는 어떤 사람에겐 불만이 될만한 이야기다.


나는 가끔...

혼자인것 같을 때가 있다


아빠와 엄마의 역할 혹은 느낌이 다른 것처럼 

지금 항상 내 옆에 있어준 사람과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영향력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같은 감정은 아니겠지만 유사할 수도 있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아닌가는 개인적으로 가늠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이러고 있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때 그 공간에서 그렇게 대하던 그 방식으로 대할 수 있다면 최상이겠지만

아마도 난 그렇게 하지 못하겠지.


내 기억에 대해 어릴 적 곤충채집에 빗대서 생각한 적이 있다.

분명 채집을 했지만 그게 결국은 잔상이고 본질은 놓친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옅어지는 것이 겠지.

나도.

너도.

가게 지하실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살고 있다.

지난 1월 처음 발견한 이 고양이는 처음엔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새끼도 아니었다.

추운 겨울이었으니 추위를 피하기 위해 지하실에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거 지하실이 사무실이었을때 사용된 듯한 냉난방기용 호스를 설치했던 창문의 구멍을 통해서 드나들었다.

처음엔 지하실에 사람이 들어오면 창문으로 바로 도망갔었다.

가끔 낮에 주차장쪽에서 보고 있으면 우리 지하실 뿐만아니라 옆 건물 지하실도 드나드는 것 같았다.

위스카스 주니어 건사료를 사서 점심에만 조금씩 사료를 두고 나갔다.

4월쯤에는 지하실에 내려가도 잘 보이지 않아서 몇 주 건너뛰었었고,

5월이 되고 날이 더워지니까 다시 지하실에서 잠도 자고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사료를 주면 창문틈으로 빼꼼이 경계하던 녀석이 이제는 도망 치지 않고 괜히 하악대기만 한다.

밥 줄때만 마주치는 사이인데 하악 거린다고 뭐라 할 건 없고;; 그냥 밥을 줬더니 이틀 후에는 하악대는 일이 줄었다.

주니어 사료가 떨어지고 같은 위스카스 포켓으로 사료를 바꿨다.

근데 이게 닭고기, 참치가 들어간 포켓 사료만 먹고 다른 사료는 먹지 않는다.

주니어 사료를 다시 사서 두면 이게 먹을까?

이 녀석이 다른 시간엔 딴 집에서 뭔가 얻어먹고 다닐텐데 뭐 좋은 거라도 얻어 먹나;;;

솔직히 닭고기를 사용하는 식당이기 때문에 닭고기를 좀 줘 볼까 했는데 요즘 닭고기 값도 너무 비싸고;;

며칠 더 지켜보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몸이 무겁다.

2개월 정도 쉬는 날도 거의 없다시피 매일 밤 9시~10시까지 가게일을 해보니 슬슬 몸살이 나고,

근육통을 끼고 살게 된다.

그러고 또 한 달이 지나 4월이 됐다.


예전에 저녁 시간때부터 새벽 2~3시 경까지 피씨방 알바를 하던 때가 있었다.

알바가 끝나면 너무 늦은 시간에 만날 사람들도 없고,

집에 가서 잠들면 4~5시, 점심이 지나 일어나기 일쑤였던데다 겨우 친구들 수업끝날때나 퇴근할때쯤이면 다시 알바 출근인 나날들.

그때 생각했다. 남들 일하는 시간에 일하고 남들 쉴때 쉬는 것이 제일 부러운 일이라는 걸.


가게일을 하면서 주말이 없을 뿐 그나마 나은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식당일이라는게 식사시간이 정해져서 바쁜게 아니었다.

점심을 2시에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나 저녁을 4시에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고.

낮에 한가할 때 개인시간 같은 건 매일 보장되는 시간이 아니다.

그나마 퇴근하면 친구들이나 만날까 했는데,

남들 모임 술자리 차려주고 치우고 나면 친구들도 술자리 끝나고 집이다.

게다가 피곤해서 나갈 생각도 사라진다.


진해의 군함제도 끝나고,

여의도의 벚꽃축제도 끝나고

춘천의 벚꽃은 이제 막 만발하려는데 비가 쏟아졌다.

봄햇살을 배경으로 벚꽃이 흩날리는 걸 볼 수 있는 시간은 없어서,

새벽 4시에 공지천에 나가 벚꽃을 보았다.

Edwin Jagger의 안전면도기와 Feather의 양날 면도날.

 

단순히 금전적인 이유였고,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는 금속 재질의 안전면도기와 면도날,

아직 솜털이었던 중고등학생때 이발소에서 해본 사각사각한 면도의 기억.

 

Edwin Jagger의 안전면도기 중 보급형에 속하는 제품을 구매했다.

Parker의 안전면도기 제품들과 고민을 좀 했었는데

약 한달 간 사용하면서 1~2만원 더 비싸더라도 Parker 제품을 살걸 그랬나 생각이 약간 드는데,

사용해보지 않는 Parker 제품이 뭐가 더 좋다기 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사긴 했지만 손잡이를 줄무늬로 산게 에러였다.

젖은 손이 줄무늬 따라 미끄러진다;;;

 

Parker의 5~6만원대 제품만 해도

중간중간 띠부분으로 덧나오거나 무늬를 생략하거나 한 제품이 있는데...

 

Edwin Jagger의 제품에 덜 미끄러지는 무늬의 제품이 없는 건 아니다.

있긴 있는데 처음 구매하는 것이다보니

대충 비슷해보이면 더 싼 제품을 그냥 산게 잘못이었다.

 

Feather의 면도날은 면도기 따라 온 제품이고 일본회사의 정밀함을 기대해봤다.

익숙하지 않은 안전면도기에 예리한 면도날이 만나고

내 턱과 입술 주변은 1~2주 동안 가끔씩 턱과 입술 주변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날이 날카로워서 그런지 피부에 자극이 많은 편이었다.

내 피부가 약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자극받은 수염의 모근들이 닭살처럼 일어나고

솟아난 수염을 면도기가 지나면 빨간 점들이 생기고;;

적응하면서 해보니 같은 자리를 너무 많이 반복해서 사용하면 안되는 듯하고

그건 모든 면도날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도루코의 양날면도날.

 

안전면도기를 사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면도날이었다.

100개 9천원대, 배송료 포함해도 1만원이 살짝 넘는 금액.

 

앞서 사용한 Feather 면도날을 사용하고 난 후

도루코 제품을 사용한 느낌은

일단 면도날을 끼울때 Feather 제품은 면도날 구멍이 커서 면도기 중앙에 위치시키려면

살짝 풀어서 조종을 좀 해줘야했는데

도루코 제품은 면도기에 거의 딱 맞는다.

거의 흔들림 없이 결합이 되는게 일단 맘에 들었다.

 

날은 확실히 날카로움은 덜한데 그만큼 피부에 상처가 남는 일이 별로 없었다.

자극이 덜하니 어느 정도는 만족할 때까지 피부에 반복해서 사용이 가능했다.

 

양날인 만큼 양쪽을 골고루 쓰는 것이 좋을텐데

Feather제품이 날 측면에 날 방향을 구분할 수 있는 눈금이 있는 반면

도루코 제품은 측면 눈금이 없었다.

 

 

그리고 제품 마감이 일정치 않다고 해야하나...

제품 측면이 살짝 벗어나서 절단되어서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다.

가끔 찔린다;;

 

대충 1달 정도 사용하면서 면도기와 면도날엔 적응했다.

다만 면도비누를 하나 사야하는데

이건 향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게 무슨 향인지 내가 몰라서;;;

결정을 못하겠다.

 

참고로

가끔 늦게 일어나 아침 시간이 부족하면 사용하던 다중면도날 제품을 쓰기도 한다.

안전면도기는 면도시간이 훨씬 길어서;;

그리고 확실히 피부자극이 더 있어서 면도전후 피부관리가 필요해진다.

솔직히 잘 하지 않는 블로그지만,

역시나 잘 하지 않던 연락을 또 개인적으로 하지 못하고 남깁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개인적인 소원과 건강도 모두 뜻하는대로, 건강하게 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도 보다 나은 사회가 되는 한 해가 됐으면 싶네요.


몇 주전만해도 올해에 대한 제 소원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월급이 적어도 좋으니까 그렇게만 되게 해달라는 염원이 있었는데

당장 1월 1일이 되어서는 취직은 포기했습니다.

제가 가족이 하는 가게에 나간다고 한 사람 몫의 벌이가 늘어나는 일은 없겠지만

언제 제대로 된 일에 취직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 계속 멈춰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라

일단 올해에는 닭갈비집에 종사하는 직원의 마음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하필 조류독감으로 안좋은 시기에 머릿수를 늘리는 꼴이라 좀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일단 한번 해봐야지요. 1년 2년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고 지금보다 나은 상황도 올거라 믿고 적어도 올해는, 잘된다면 내년에도 식당에서 일을 할 생각입니다.

솔직히 지금 굉장히 짜증나고 화나는 상황이다.


어머니는 춘천에서 닭갈비 장사를 하셨던 분이시다.

그러다 2010년 시의원이 되셨다.

시의원은 솔직히 가게를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 같이 살고 있던 우리 부부, 정확하게는 당시에 나는 회사에 일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아닌 우리 와이프에게 자신이 의원이 되서 가게까지 하고 있으면 욕심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냥 그만두기에는 장사가 잘되는 가게가 아깝다고 맡아서 해줄 수 없겠냐고 그러셨다.

개인적으로 우리 어머니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얽히지 말고 그냥 안했으면 했는데

시의원 임기가 끝나면 다시 본인이 가게를 할테니 그때까지 맡아서 하라는 식으로 설득을 당했다.


아이가 생겨 급하게 결혼하게된 상황이라 아직 부모님의 권유를 쉽사리 뿌리치지 못한 부분도 있었을 테지만, 생각해보면 결혼할 때 분명 대학교 휴학생 신분이었던 우리 와이프 졸업하게 해주겠다던 우리 부모님의 약속도 나중에 참 어이없는 결론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나가게된 가게에서 어머니는 만나는 단골손님마다 시의원되서 가게하기 그렇게 됐는데 며느리가 자기가 할 수 있을거 같다고 하길래 물려줬다는 얘기를 하셨다.

임시로 2년간 맡기로 나간 가게에서 가게를 물려받은 며느리로 얘기도 하시고 인사도 시키시고.

역시 어머니 앞에서 임시로 맡은 거라고 손님들께 다시 설명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집에서 몇번의 트러블이 생기고 결국에 와이프가 가게에 대한 운영권을 갖게 되지만 역시 명의는 그대로 어머니 명의인 채로 였다.


시의원이자 가게 사장님인 어머니의 소득세도 가게에서 부담됐다.


그리고 어머니는 다음 임기에 또 당선이 되셨다.


시나 닭갈비협회에서의 보조금 형식으로 실내외 개보수를 진행했었던 것 같은데 그 공사에 대한 비용도 그리 만만치 않았고, 옆에 조그만 분식집 나가고 난 후에 건물주와 어머니가 어떤 얘기를 하시고는 그 부분을 터서 우리 가게로 확장을 하셨다.

가게 소득이 점점 늘어서 자연스럽게 확장을 하게된 게 아니라.

가게에서는 고기값도 제대로 내기 힘든데 확장하고 공사하고 임대로 올리고

가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는 더 늘릴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내가 퇴직을 하고,

고기값은 1000만원이 넘게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머니는 임기가 끝나고 현재는 닭갈비협회장이 되셔고,

닭갈비협회장이 되신 해의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에 우리 가게가 나와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다.

일단 우리 집사람은 못하겠다고 했는데

고기값을 갚아야되니 축제하고 돈 벌어서 갚아야 하지 않겠냐고


아 여기서 작년 닭갈비축제 얘기를 한 번 하자.

작년엔 축제장은 어머니가, 가게는 우리 집사람이 담당을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력의 분배가 그렇게 되고 수입에 대한 그런 분배까지 그렇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 자세하게 들어가면 축제장에서 고생해서 번거 당연히 축제장에서 일하신 분들한테 가고 가게에서 일한거 가게에서 해결하는 건 당연한데.

일주일간 준비할 땐 나나 우리 집사람이나 이리저리 불려다니고 뛰어다니고 돈 써가면서 축제 준비 다하고 철수도 다하고

다 끝나고 어머니 얼마나 벌었어요? 물었더니 그걸 너네가 왜 신경쓰냐고 하신다.

카드 결제 대금이야 통장으로 들어갈테고 그걸로 처리하면 되지 현금은 신경쓰지 말라고 하신다.

축제장 밥값, 미뤘던 대금, 축제장에서 일했던 아주머니들 임금까지 우리 통장에서 나갔는데.


이래서 올해엔 축제에 나가기 싫었다.(이건 내 입장이다. 집사람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고기값도 있고 하니 하란다.

일단 내용은 시의원일 때랑 비슷한 구도다.

자기는 협회장이니까 이번 축제는 집사람이 맡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분명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야간에 내가 축제장 도와주면 애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머니께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애를 보는게 어떨까 하셨다.

그리고 축제를 준비했다. 100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 준비를 하고

한 시간 마다 몇 번씩 축제장과 가게를 들락거리며 나르고


나는 아이가 학교 끝날 때 들어가서 좀 쉬었지만

밤 9시에 나갔더니

어머니는 이미 축제장에서 손님들과 한잔씩 하셔서 많이 드신 모양이고

여전히 며느리에게 물려줬다며 어머니 가게 안나오신 5년간 몇번 오지도 않은 예전 단골 손님께 떠들고 있고

그 단골 손님은 또 그 앞에서 자기가 우리 가게 자주 왔는데 며느리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떠들고 있고


아이 내일 학교 등교때문에 11시에 들어가봐야될거 같다고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차에 탔는데

어머니가 와이프한테 전화를 거셨다.

금고에 왜 돈이 없냐고

이미 축제장 영업은 끝났고 더 계산할 손님도 없고 만약 돈이 필요한 상황이면 자기돈을 쓰거나 일하는 사람들끼리 좀 빌려쓰고 내일 받으면 될 일인데 왜 전화를 했나 했다.

오늘 하루 얼마 벌었는지 왜 얘길 안하냐고

아까 전체 얼마정도 벌었다고는 얘기 한거 같기도 한데

집사람 입장에서는 전체적인 금액만 알려드리면 된다고 생각했고

어머니가 전화까지한 이유는 오늘 번 현금이 얼만지 궁금해서였다.

현금은 자기차지다 이 얘기다.

10여분간 집에와서 주차할때까지 술취한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와이프 옆에서 운전하려니 성질이 난다.


현금 100만원 정도 번거 내일 어머니 갖다 드리면 된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번 축제로 고기값 못 갚으면 나는 어머니 말고 아버지한테 가게 못하겠다고 얘기하고 싶다.


추가로 우리 와이프 대학교 졸업시켜주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한 결말.

올해 7월 언제였는지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내 핸드폰으로

와이프 다니던 대학교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이거 제적 통보라고 적혀있는데 이거 뭐니? 하시면서

이 내용을 아버지도 아시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뭐 평소엔 원래 반응이 별로 없으신 분이시긴 하지만

분명 술 드시면 와이프한테 미안하다고 한 번 얘기하실만한 얘깃거린데

아직 별 반응이 없으시다.

와이프한테 전하기는 했지만

우리 부모님이 장인어른 장모님 앞에서 직접 하신 약속인데

와이프에게 직접적으로 언급을 안하신다.

해당 우편물이라도 당사자에게 전해주시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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