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한국 흑인음악의 원류-

“사랑과 평화요? 잘하죠.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게 멋진 보컬과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아요?” 이 정도다. 지금의 대중들에게 사랑과 평화라는 그룹은 이 정도인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끔 윤도현이 진행하는 음악프로에 나오고 익숙한 노래들을 부르면 “아, 그 노래?” 할 정도는 되고, 나이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보컬 이철호의 모습에서 노장의 저력을 실감하고…. 그냥 이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과 평화는 ‘그 정도’의 그룹이 아니다. 무슨 경로우대증이나 발급 받으면 만족할 만한 정도의 ‘포스’를 지닌 팀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상을 바꿔보자. 비틀스로, 스티비 원더로, 에어로스미스로, 유투로. 누가 그들을 “그냥 잘하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음악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요새 것이 음악이기나 해? 적어도 스티비 원더는 30년 전에 그것보다도 훨씬 멋진 것들을 다 만들어놨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사랑과 평화는 1970년대 말 마약사건 이후 하는 수 없이 주류가요계에 백기투항을 선언한(가요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될) 거의 모든 음악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지조를 지키며 살아남은 팀이다. 단순히 그들이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뛰어난 작업들을 남겼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묻혔다. 잊혀졌다. 산울림은 조명되었고 신중현은 복권되었지만 사랑과 평화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의 이철호가 김창완 만큼 대중적인 스타가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신중현 만큼 평론가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록 위주로 재정립된 한국 대중음악의 계보도에서 흑인음악인 훵크와 소울을 구사했던 이들이 부여받을 방 한칸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78년의 사랑과 평화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가요 사상 최상의 결과물 중 하나를 분명 만들어냈다.

믿기 어려운가? 익숙한 A면 대신 B면부터 귀를 기울여보자. 훵크와 소울, 심지어는 재즈의 매력을 물씬 풍겨대는 ‘달빛’과 ‘저바람’은 이제는 사실상 맥이 끊긴 한국형 흑인음악의 원류이다. 너무도 충만한 리듬감에 절묘하게 어긋났다 다시금 맞아떨어지는 연주의 질은 쉽게 흘려버릴 수 없다. 다양한 이펙터와 디스토션 위를 오가며 현란하게 재주를 부리는 최이철의 경이로운 기타, 탄탄한 배킹과 꽉 짜여진 인터플레이를 보여주는 사보(SARVO)의 베이스와 김명곤, 이근수의 키보드 역시 대단하다. 진지하되 심각하지 않다. 진국이지만 텁텁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다.

앨범을 수놓은 그 어떤 이름도 쉽게 지나칠 수 없지만 이 앨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장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김이환, 이경애, 이원호 등 무려 세 가지의 가명을 쓰며 앨범의 주요곡을 작곡한 웃지 못할 사건의 주인공이 된 이장희. 그는 진정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이 배출한 가장 스타일리시한 음악가였음을 이 앨범은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흑인 음악을 하고 있는 그 어떤 젊은 뮤지션들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철호와 박광수를 찾길 바란다. 그리고 잊혀진 한국 흑인음악의 원류를 더듬고 그 맥을 잇기 바란다. 그들이야말로 당신들이 숭배하고 떠받들어야 할 제임스 브라운이고 스티비 원더이다.

◇‘사랑과 평화’ 프로필

·결성 : 1978년

·구성원 : 이철호(보컬) 송기영(기타) 이승수(베이스) 홍현민(키보드) 정재욱(드럼)

·주요활동

-1970년대 중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서울 나그네’가 전신

-1978년 당시 DJ로 활동하던 이장희의 도움으로 1집 ‘한동안 뜸했었지’ 발표

창단 멤버는 이남이(베이스), 이철호(보컬), 최이철(기타, 보컬), 김명곤(키보드), 김태흥(드럼)

-1979년 2집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발표

이남이 빠지고 송홍섭(베이스) 영입

-1983년 드러머 김태흥 교통사고로 사망

-1988년 3집 ‘사랑과 평화 VOL1’ 발표. ‘울고 싶어라’ 히트

사랑과 평화 2기. 최이철, 이남이 등 원년 멤버와 새로운 멤버 한정호(키보드), 최태일(베이스),

이병일(드럼) 등 보강

-1989년 4집 ‘샴푸의 요정’ 발표

이남이가 솔로로 나가고 박성식(키보드), 장기호(베이스) 영입

-1992년 5집 ‘못생겨도 좋아’ 발표

박성식과 장기호, 종교적 이유로 ‘빛과 소금’ 결성해 떠남

사랑과 평화 3기. 이승수(베이스) 안정현(키보드) 들어옴

-1995년 6집 ‘Acoustic Funky’ 발표

-1999년 최이철과 안정현, 미국으로 음악 공부하러 떠남

-2003년 7집 ‘Love & Peace: The Endless Legend’ 발표

-2006년 드러머 이병일 뇌졸중으로 사망

-2007년 8집 ‘Life & People’ 발표


〈김영대|웹진 음악취향Y 필자·선정기획|가슴네트워크〉
-비탄·한숨 없는 ‘도회적 포크송’-

좋은 음악은 난세(亂世)가 빚는 저주 어린 축복인 것일까? 한국 대중음악의 결정적인 르네상스가 1980년대 군사독재의 모진 정치적 탄압 아래에서 펼쳐졌다는 것은 지금도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민중가요야 시대와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찾을 수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군사정권의 암묵적인 3S 정책’ 아래 팝과 록, 포크, 헤비메탈, 퓨전 재즈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 대중음악사를 좌지우지하는 걸작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3저 호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병우와 조동익이 결성한 포크 듀오 어떤날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당시의 상황과는 무관한 맑고 서정적인 노랫말과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송 라이팅으로 단연 새로운 음악적 질감을 선보였다. 흔히 한국적이라고 하는 토속성과 질박함을 찾기 어렵고, 또한 비탄과 한숨의 비극적 정조 역시 탈색되어 어떠한 ‘뽕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의 음악은 도회적이고 깔끔했다. 이들은 자신과 세계를 예민하게 들여다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고,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낙관적이었다. 이것은 경제개발의 성과 아래 자라난 1960~70년대 생들이 드디어 한국 사회의 주류로 등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경제적 어려움을 별로 겪지 못해 ‘가난’에 대한 강박이 없고, 비교적 안정된 사회 속에서 특별한 고난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가요라고 불렸던 한국 대중음악보다는 영·미권의 팝과 대중문화를 소비하며 성장한 이들의 감수성은 그 이전 세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똑같이 기타를 치고 있었지만 김민기의 지사적 포크송이나 정태춘의 한국적 포크송은 이들의 감성에 어울리지 않았고 결국 이들에게는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의 음악적 뿌리는 기실 하나뮤직의 좌장이 된 조동진에게 있는 것이었지만 이들의 음악은 조동진보다 훨씬 투명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 동아기획을 주축으로 건설된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성채 한편에 세워진 어떤날의 포크음악은 당시 젊고 여리며 여성적인 감성을 가진 이들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폭풍 같은 시대의 열풍 속에서 위로와 안식이 필요했던 젊음에게 이들의 음악은 부족함이 없었다. 팀 이름 외에는 거의 쓰여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운 아트워크 역시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의 1집은 젊은 뮤지션들의 첫 앨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였다. 하여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음악의 기념비가 되었으며 2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1집에 비해 퓨전 재즈적인 감각이 한층 강해진 2집에서도 조동익과 이병우는 직접 곡을 쓰고 기타와 신시사이저를 연주했으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담당했다. 실력 있는 세션들이 이들을 도왔는데 속삭이는 듯 다감한 보컬과 상큼한 신시 연주를 주축으로 펼쳐지는 세련된 음악은 지금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단정하기만 하다. 이것은 은둔한 채 오직 작업에만 몰두하는 작가주의적 경향의 산물이었는데 그 결과 이 앨범에서도 ‘출발’ ‘그런 날에는’ ‘11월 그 저녁에’를 비롯한 많은 곡들이 사랑받았고 다시 불렸다. 특히 ‘출발’의 통통 튀는 기타 간주나 ‘그런 날에는’ 전주의 짧은 기타 연주에 이어지는 밝고 감각적인 멜로디는 어떤 날 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조동익과 이병우는 단 두장의 앨범만을 내고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 이제는 앨범 프로듀싱과 영화 음악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날이 뿌려놓은 씨앗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영롱한 순간을 증언하며 하나의 획을 그었고 지금도 새롭게 열매 맺고 있다.

◇‘어떤날’ 프로필

·결성 : 1985년

·구성원 : 조동익(보컬, 베이스/1960년생)/이병우(보컬, 기타/1965년생)

·주요활동

-1980년 조동익이 둘째형 조동진의 2집에 ‘어떤날’이란 곡을 주면서 본격적 음악 활동 시작

-1984년 최진영의 소개로 조동익과 이병우가 처음 만남

-1985년 옴니버스 앨범 ‘우리노래 전시회 I’에 ‘어떤날’ 이름으로 ‘너무 아쉬워하지마’ 발표

들국화 1집에 ‘오후만 있던 일요일’ 발표

-1986년 어떤날 1집 ‘1960·1965’ 발표

-1987년 옴니버스 앨범 ‘우리노래 전시회 Ⅱ’에 ‘그런 날에는’ 발표

-1989년 어떤날 2집 ‘어떤날Ⅱ’ 발표/ 이병우의 기타 연주집 ‘내가 그린 기린 그림’ 발표

-1992년 조동익은 함춘호, 손진태, 김현철과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앨범 발표

-이후 조동익과 이병우는 각자 독집 앨범을 내고 영화음악 등의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있음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세상을 살면서 누구든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마련이지만 막상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변화를, 혹은 변화의 필요성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태도는 그 변화의 빌미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부에서 강압적으로 부여받은 때가 많았다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이상은의 획기적인 변화는 적잖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종종 거론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상은은 스스로 변화의 길을 걷고자 했으며 마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는 투의 자기 세상에 푹 빠져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상은은 아직도 변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결코 삶을 만만히 보는 자만심에서 비롯되지 않았을 거란 심증이 꼬리를 문다. 그게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세번째 앨범인 ‘더딘 하루’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던 이상은의 변화가 군더더기 없이 제련된 매력적인 모습으로 정점에 이른 것이 바로 ‘공무도하가’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올랐다가 홀연 고향을 떠나 뉴욕으로, 일본으로 떠돌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이 여행이 4년에 접어들면서 발표한 ‘공무도하가’는 그때까지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가사와 작곡, 그리고 편곡과 구성미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참신함의 첫인상을 남긴 이 작품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생각과 이미지를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 1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우리가 미처 뽑아내지 못한 가치가 이 앨범에 더 숨겨져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앨범에 실린 곡들 중에서 발표 당시 매체의 주목을 받은 것은 타이틀곡인 ‘공무도하가’였고, 음악을 찾아듣던 대중이 특히 환호한 것은 아름다운 가사와 좋은 보컬 더빙이 가해진 ‘새’였다. 하지만 만약 여기에서 단 한곡이라도 빠졌거나 더해졌다면 앨범의 의미는 반감됐을 것이다.

작품을 이루는 소재는 하나같이 ‘흐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물이 흐르고, 구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흐르고,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화자 또한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흘러가기만 한다. 그래서 첫곡으로 실린 ‘보헤미안’은 스스로 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고백과도 같다. “내 어머니는… 길이 있을 거라고 등을 밀어 바다로 가라고 했었다.” 그 여정에서 목격하고 느낀 많은 것들이 이 걸작을 낳았다. 하나의 작품 안에 이처럼 다양한 음악적 색채가 조화롭게 엮인 경우를 우리는 쉽게 만나지 못했다. 포크와 록,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월드 비트와 재즈, 때로 현대음악의 흔적까지, ‘공무도하가’에는 우리가 설정할 수 있는 대다수의 음악 요소가 혼재돼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이미지의 무게가 워낙 큰 것이어서 정체성의 우려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 점이 우리 음악사에서 이 작품이 지니는 궁극의 가치이며 이상은은 이 앨범 하나만으로도 칭송받아야 마땅하다. 음악인이라면 응당 변하기 위해 언제든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떠올린다. 〈김현준|재즈비평가〉

-시와 국악, 몽상과 명상이 뒤섞인 ‘괴물’-

지금의 이상은은 그 누구의 침범도 허하지 않는 자유인, 보헤미안 혹은 자의식을 가진 뮤지션의 대표처럼 여겨진다. 그런 이상은의 시작이 1988년 강변가요제 대상 곡 ‘담다디’였다는 사실은 이제 농담으로라도 그다지 우습지 않은 설명이다. 70년생인 그녀가 아직 채 성년도 되지 않았던 그해부터 91년, 최고의 자리에서 갑작스레 뉴욕 유학을 발표하던 시기까지의 그녀는 연예산업의 거대한 쳇바퀴 안에서 돌고 또 도는 시대의 아이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훌쩍 떠난 뉴욕에서 발표했던 ‘더딘 하루’와 ‘Begin’, ‘이상은’을 거치면, 시와 국악, 몽상과 명상이 뒤섞인 괴물 같은 앨범 ‘공무도하가’가 기다리고 있다.

이 앨범이 이상은의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격렬한 변화를 가져온 진원지였으며, 이 전의 그녀와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 준 앨범이라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표하기 힘들 것이다. 좀 더 온기를 더한 ‘외롭고 웃긴 가게’가 이어지고, 이상은은 음악 파트너 하지무 다케다와 손을 잡고 ‘리채(Lee-Tszche)’라는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전면에 내세운 8집 ‘Lee Tszche’와 9집 ‘Asian Prescription’으로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오리엔탈리즘의 자승자박에 빠지는 건 아닐까 잠시 물음표를 떠올리는 사이 열번째 앨범 ‘Endless Lay’부터 조금씩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기 시작한 이상은은 ‘신비체험’을 거쳐 12집 ‘Romantopia’에서 또 다시 핸들을 튼다. 일상이 주는 편안함과 달콤함에 반해있는 지금 그녀의 음악은 아마 또 어딘가 다른 곳으로 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뮤지션 이상은이 매력적인 건, 아직까지도 펄펄 살아 숨쉬는 그 생명력 때문은 아닐까. 〈김윤하|웹진 가슴 편집인〉
앨범의 시작과 동시에 시작되는 ‘노 캐리어’의 전자음과 디스토션이 잔뜩 걸린 사운드의 향연은, 델리 스파이스의 데뷔작을 ‘차우차우’만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이제는 살짝만 물어도 잇자국이 푹 파일 정도의 말랑말랑함으로 변해버린 ‘모던 록’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와 이 데뷔앨범은, 사실 출발선부터가 전혀 다르다. 우선 모던 록은 ‘그런’ 음악이 아니다. 따라서 달콤한 사랑의 시, 혹은 이별에 대한 성찰과 러브송 따위는 이 앨범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 빈자리는 뒤틀린 냉소와 촘촘히 가시가 박힌 목소리의 차지다.

델리 스파이스가 “이 앨범으로 대한민국의 인디신의 판도를 바꾸었다”는 단순한 표현은 이 앨범의 설명으로 무언가 부족하다. 그보다도 이전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차원으로 청자들을 이끌어줬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고급화된 발라드와 댄스 음악 섭렵에 여념이 없던 대중가요판은 물론, 펑크와 하드코어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기 힘들던 홍대 바닥에서조차도 U2와 R.E.M을 운운하며 등장한 이들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에 다름아니었다. 이 위에 이 앨범을 세상에 내놓기 직전까지만 해도, 멤버들 모두 평범하게 컴퓨터 속에서나 뛰놀던 리스너일 뿐이었다는 사실까지 더해진다면, 역사가 될 준비는 모두 끝난다. 그 기초 위에, 우러러 마지않던 영·미권 형님 밴드들의 음악에 결코 뒤지지 않는 멜로디와 감성이 덧씌워진다.

낯설지만 청량한 멜로디들과 물기 어린 사운드가 귓가를 자극하고, 노래 하나 하나가 뿜어내는 리듬들이 온 몸의 감각을 건드린다. 조금은 위악적이지만 위트 있는 윤준호의 노래, 그리고 청순함과 독기가 공존하는 김민규의 노래가 끊임없이 교차편집되면서, 마치 ‘모던 록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스릴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한번 더 폭발하는 것은, 그동안 미처 분출구를 찾지 못했던 90년대 모던한 청춘들의 외침이다. 그 외침은 록 밴드 앨범에서는 자칫 가볍게 지나칠 수도 있는 노랫말에서 비롯한다. ‘차우차우’의 서브타이틀이기도 한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보자. 아마도 이 노래는 평론가들에게 까칠한 한마디를 던지려 했던 이들 젊은 날의 정서와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사랑 노래로서의 역할, 이 두가지에 영원히 충실할 것이다. 이런 능숙한 야누스의 두 얼굴은 이 앨범의 큰 매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기쁨이 없는 거리’와 ‘사수자리’의 촉촉한 서정과 ‘누가’와 ‘저승 탐방기’ 등에 나타난 서늘한 냉소들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앨범에 녹아든다. 그런 노랫말들을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멜로디, 청량한 밴드 사운드가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는 것은, 이제 두번만 더 말하면 백번도 채우고 남을 것이다.

만일 이 짜릿한 신선함이 ‘델리 스파이스’의 ‘첫 번째 앨범’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것이라면, 대한민국의 모든 음악팬들이 속상할 일이다. 대한민국 대중음악 판에 록 음악이 살아있는 동안 이 앨범은, 자의든 타의든 그런 바람들의 이정표 역할을 계속해 나가게 될 것이다.

-90년대 모던 청춘들의 뜨거운 외침-

한국의 모던 록을 이야기할 때 영원히 빠지지 않을 이름 델리 스파이스. 1995년, PC통신에 올렸던 김민규(기타/보컬)의 밴드 구인 글에 단 한 사람, 윤준호(베이스/보컬)가 연락을 해왔다. 이 소박한 만남에 이들과 평소 알고 지내던 오인록(드럼)과 이승기(키보드)가 모이면서 2년 뒤인 1997년, 델리 스파이스의 싱싱한 데뷔 앨범 ‘Deli spice’가 태어난다. 이 앨범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대중과 평론가 모두를 들썩이게 만들 정도로 뜨거웠는데, 그런 성공 이후 두번째 앨범 ‘Welcome To The Delihouse’가 조심스레 발매된다.

첫번째 앨범에 비하면 다소 낯설 정도로 화려하고 경쾌했던 이 앨범은 드러머가 최재혁으로, 키보드 역시 양용준으로 교체되었던, 음악과는 반대로 밴드로서는 다사다난한 앨범이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세번째 앨범 ‘슬프지만 진실…’까지가 이들에게는 밴드 외적인 면에서의 고뇌가 많았던 시기였는데, 3집 발매 이후 소속사와의 결별, 키보디스트 양용준의 탈퇴라는 진통을 겪게 된다. 이후 델리 스파이스는 더 이상의 새 멤버를 들이지 않고 현재까지도 김민규, 윤준호, 최재혁의 3인조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실한 밴드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2001년 발표되었던 네번째 앨범 ‘D’부터 5집 ‘Espresso’, 6집 ‘BomBom’으로 차근차근 디스코그래피를 쌓아가는 것은 물론, 다양한 인디 앨범들의 프로듀스,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스위트피(Sweetpea)’ 활동과 인디 레이블 ‘문라이즈(Moonrise)’ 설립, 윤준호와 최재혁, 키보디스트 고경천이 결성한 밴드 ‘오메가3’에 이르는 활발한 활동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음악 하는 ‘재미’를 찾은 당당한 현재진행형 밴드, 지금의 델리 스파이스다.

〈김윤하|웹진 가슴 편집인〉
히피문화는 베트남전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됐다. 기존의 관념과 가치관에 대항하던 히피문화는 ‘청년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유입되며 큰 사회적 변혁을 몰고 왔다. 무명에 불과했던 신중현이 ‘펄시스터즈’를 발판으로 ‘신중현사단’이라는 철옹성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68년이다. 그해 트윈폴리오와 더불어 미국에서 건너온 한 장발 청년은 한국 포크사에 이정표를 제공했다.

바로 ‘한국 모던 포크의 개척자’ 한대수의 등장이다. 그는 외국 히트 팝의 번안곡 부르기에 급급했던 당시 대중음악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귀국 첫 무대는 TBC TV PD 이백천의 주선으로 출연한 ‘명랑백화점’. 당시 TV에 나온 그의 모습은 자신의 어머니조차 부끄러워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온통 장발의 그가 여자냐 남자냐며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했다. ‘주간 중앙’은 ‘최초의 히피, 한국에 등장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곧 ‘우리나라를 떠나라’는 비난여론까지 비등했다. 당시 아무도 그가 진지하게 세상의 고민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임을 알지 못했다. 69년 9월 두 여대생의 도움으로 ‘옥이의 슬픔’ ‘행복의 나라로’ 같은 창작곡은 물론 톱으로 연주를 한 전위적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을 열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들쑤셔 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그의 공식무대 활동은 금지되었다. 음반발표는 언감생심, 서울과 지방의 대학가에서만 노래를 계속했다. 먹고 살기 위해 디자인포장센터에 취업했지만 날벼락 같은 입대영장이 날아와 3년간 해군 수병으로 복무하며 완전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74년 제대 후 그는 가수가 아닌 김민기의 ‘바람과 나’,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 작곡가로 변해 있었다.

국내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6년 만인 74년에야 1집이 만들어졌다. 김진성의 주선으로 신세계레코드를 통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음반작업에 필요한 시간은 8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포크가수 방의경의 기타를 빌려 드럼 권용남, 베이스 조경수, 첼로 최동휘, 피아노와 플루트 정성조의 탄탄한 라인업과 4트랙 동시녹음을 했다. 우선 파격적인 앨범 재킷이 압권이었다. 사진작가인 자신이 촬영한, 거친 입자의 흑백사진 속의 자화상이 삐딱하게 클로즈업되어 있는 이미지는 강렬했다. 앨범사진과 타이틀곡은 자신이 걸어야 될 험난한 길에 대한 예고였다.

총 8곡의 수록곡 중 소홀히 넘길 곡은 단 한곡도 없다. 불협화음의 연속인 ‘물 좀 주소’는 한대수가 연주하는 생소한 카주(전자 풀피리소리의 느낌) 소리와 함께 자유와 사랑을 타는 목마름으로 호소했지만 끝내 탄압과 금지라는 현실에 절망하는 절규의 목소리가 되었다. 김민기가 먼저 취입한 ‘바람과 나’의 한대수 버전은 정겨운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서정적인 포크 질감을 선보였다. ‘옥이의 슬픔’에서 정성조의 격조 있는 플루트 선율과 투박한 한대수의 경상도 억양이 빚어내는 소리의 향연도 들을 거리다. 17세 때 만든 ‘행복의 나라’는 한국 대표 포크송이 되었다. 가수의 대표곡은 인생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그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마음껏 음악활동을 하며 자식까지 낳으며 행복의 나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최규성|대중문화평론가〉

-자유와 사랑에 대한 타는 목마름 호소-

한대수의 1집 ‘멀고먼-길’은 1974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발표되었다. 이 앨범에는 지금까지도 불리는 그의 대표곡 ‘물 좀 주소’ ‘바람과 나’ ‘행복의 나라’가 수록되었다. 그는 2집 ‘고무신’(1975)을 발표하고 미국 뉴욕으로 음악적 망명을 한 후 하드록밴드 ‘징기스칸’ 활동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다 89년에 잠시 귀국해서 그의 최고 앨범이라 할 수 있는 ‘무한대’를 발표한다. 이 음반은 14년의 공백을 깨고 포크에서 록으로 방향을 전환해 만든 명작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새로운 음악을 인정해주지 않자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이전과 달리 이때부터는 음악창작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음반들이 ‘기억상실’(90), ‘천사들의 담화’(91)이고 여기에는 잭리(이우진)와 이우창 형제가 참여한다.

6집 ‘1975 고무신 서울~1997 후쿠오카 라이브’(99)는 국내에서 한대수가 재평가받으면서 나온 앨범. 같은 해에는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가 발표되었다. 음악적으로 새로운 분기점이 되는 8집 ‘Eternal Sorrow’(2000)가 손무현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이 음반은 후기 한대수의 대표작이 된다. 그리고 2002년에 김도균밴드, 이우창의 독집 앨범들과 함께 묶여 발매된 ‘삼총사’에는 ‘고민 Source Of Trouble’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As Forever’와 같은 멜로딕한 노래부터 ‘호치민’과 같은 광폭한 노래들까지 함께 실렸다. 2004년에는 10집 ‘상처’가 발표되었다. 이후 2001년에 가졌던 ‘마지막 콘서트’를 담은 ‘2001 Live’(2005)가 나왔음에도 12집 ‘욕망 Urge’(2006)가 어김없이 나왔고, 같은 해에는 도올 김용옥과의 합동 콘서트를 담은 ‘한대수 도올 광주라이브’를 발표했다. 한대수의 디스코그라피에서 주목하지 않을 음반은 하나도 없다.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gaseum.co.kr〉
‘한국 록의 신기원’이라는 진부한 멘트는 적어도 이 앨범에 있어서는 유효한 표현이다. 애드훠와 덩키스, 그리고 더멘을 비롯한 수많은 밴드를 거친 신중현은 심플한 3인 체제의 구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에 5인조로 시작했던 엽전들은 신중현을 중심으로 베이스에 이남이, 드럼에 김호식을 영입하지만 후에 권용남으로 멤버가 교체되며 첫 번째 앨범인 본 작을 1974년에 발표한다.

엽전들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은 두 가지 버전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러닝타임이 4분30초가 넘는 초기 버전은 1973년 오일쇼크로 휘청대던 음반사에서 “팔리지도 않을 음반을 제작할 수 없다”며 1000장을 비매품으로만 찍었는데, 이 버전은 사이키델릭한 초기 멤버들로 이루어진 앨범으로 현재 LP로 구입하려 할 경우 무려 10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을 제시해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후 새로운 드러머 권용남을 영입해 만든 버전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앨범이다. 초판이 사이키델릭에 집중했다면 현재 우리가 듣는 버전은 하드록적인 성격이 강하다 할 수 있겠다.

러닝타임을 줄여 새롭게 발매한 앨범은 폭풍 같은 실적을 이뤄냈다. 당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미인’을 불렀다. 음반은 미친 듯이 팔려나갔으며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100만장의 고지마저 점령했다. 밴드가 직접 출연하는 ‘미인’이라는 제목의 영화도 제작되면서 침체된 음반시장은 갑자기 유례없는 호황기에 접어들지만 ‘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수록곡은 저속하다는 이유로 방송 부적합 판정을 받는다.

앨범은 커버 뒤에 써 있는 글 그대로 ‘긍정적인 엽전정신’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그루브하며 동시에 시원한 하드록의 진행으로 이뤄져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적이라는 가장 강력한 메리트가 있다.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주로 사용하는 5음계를 이용하며 한국적인 멜로디를 서양의 하드록에 접붙였다. 이러한 요소 덕분에 일본은 물론 해외의 많은 애호가들이 본 작을 사랑했다.

후에 수도 없이 리메이크된 삼천만의 히트곡 ‘미인’을 시작으로 그루브한 전개의 ‘그 누가 있었나봐’ ‘긴긴밤’, 스트레이트한 진행을 가진 ‘생각해’ ‘저 여인’, 연주 중간에 노래를 멈추게 하고 여자친구가 화낸다면서 가사를 바꿔 부르는 ‘나는 몰라’, 7분여의 사이키델릭한 여정을 담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이 불세출의 걸작은 마무리된다.

오리지널 앨범 커버 뒤에 써 있는 음악평론가 최경식씨의 추천사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의 로크(Rock) 뮤직은 있었던가? 한국의 로크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 가능성은 바로 이 앨범에서부터 확실해졌다.

〈한상철|음악애호가·뮤지션〉

-한국 전통 5음계 서양 하드록에 접목-

신중현이라는 뮤지션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는 것은, 지금껏 그가 몸담고 손을 담갔던 모든 앨범들의 제목을 단숨에 읊어 내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1950년대 후반 미8군 무대 활동을 시작으로 ‘애드 훠(Add 4)’, ‘덩키스(Donkeys)’, ‘더 맨(The men)’ 등의 무수한 밴드를 만들고 거치며, 박인수, 김추자, 펄 시스터즈 등 무수한 뮤지션들을 정상에 올리며 ‘신중현 사단’을 만들던 그 신화가 바로 신중현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 수많은 활동들 중 가장 빛나는 정점에, ‘신중현과 엽전들’이 있다. 73년 신중현(기타/보컬)과 이남이(베이스), 권용남(드럼)의 3인으로 결성된 이후, 이듬해인 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은 대한민국 록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첫 번째 앨범을 세상에 던진다.

기타 리프? 임프로비제이션? 사실 이런 복잡한 단어들은 아무것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미인’ ‘떠오르는 태양’ ‘나는 너를 사랑해’ 등의 앨범 수록곡들을 듣는 순간, 후두부가 얼얼해지는 바로 그 느낌이 이 앨범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획기적’이며 ‘진보적’인 록 음악은 이 앨범 안에 모두 담겨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황금기도 잠깐, 정권찬양가 요구를 무시했던 신중현에게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영혼으로서의 꿈틀대는 생기를 잃어버린 후, 연주곡만이 담긴 앨범 두 장과 건전가요 풍의 가사들만이 담긴 2집을 내놓은 엽전들은 1975년 12월, 신중현이 대마초 파동으로 ‘대마초의 왕초’라는 누명을 쓰면서 창작의 끈을 빼앗긴 뒤, 그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만다. 그리고 그 역사는 대한민국 록 음악의 가장 어두웠던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윤하|웹진 가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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