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의 몸에 담긴 서정적 멜로디-

1985년과 86년은 한국 록의 역사에서 르네상스로 기억될 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국의 로커들이 한데 모여 그룹사운드 페스티벌을 열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작은하늘, 블랙홀, 블랙신드롬 등이 전면에 나섰고 학교에서는 신윤철, 손무현, 오태호 등 기타 연주자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또 신중현의 주도로 국내 최초의 록 전문 공연장 이태원 록월드가 생겨났다.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 신대철, 김도균, 김태원 3대 기타리스트의 등장과 시나위, 부활, 백두산의 삼두체제의 태동이다. 시나위, 부활, 백두산은 86년 나란히 데뷔 앨범을 냈고 그중 부활의 ‘Rock Will Never Die’는 3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가장 많은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이승철의 합류 전 부활은 ‘디 엔드’라는 이름으로 이미 언더그라운드에서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후 김종서를 거쳐 이승철을 영입한 뒤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데뷔앨범을 발표한다. 부활의 콘서트장은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고 소녀 팬들은 ‘희야’에 열광했다. 그 중심에 당대 최고의 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인 김태원과 미성의 로커 이승철이 있었다.

부활은 시나위, 백두산과는 달랐다. 록을 기본으로 하지만 밴드의 음악을 관통하는 것은 수려한 멜로디다. 금속음과 속도경쟁이 판치던 시절 부활은 헤비메틀의 조류에 합류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룹의 리더 김태원은 주류 가요에서부터 클래식까지 폭넓게 수용해 독창적인 기타 연주를 보여줬다.

‘희야’에서의 애절한 인트로,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비장한 솔로는 김태원의 독특한 사운드메이킹을 분명히 드러냈다. 김태원의 기타는 발라드로 대표되지만 이 앨범에서 연주의 백미는 ‘인형의 부활’에 녹아 있다. 이 곡에서 김태원은 절제된 속주, 섬세한 피킹, 강약을 넘나드는 템포 등 자신의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김태원의 연주는 신대철이나 김도균처럼 힘 있고 빠르진 않지만 슬로, 미드 템포에서 더 화려한 광채를 뿜어낸다.

김태원이 부활 사운드의 핵이라면 그 사운드를 더 찬란하게 하는 것은 이승철의 보컬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와 양홍섭이 작사·작곡한 ‘희야’는 이승철을 위한 곡이었다. 이승철의 미성은 록보컬로서는 단점이 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곡들로 인해 오히려 최고의 서정성으로 팬들에게 어필한다. 향후 조용필의 후계자로 지목 받을 만큼 가요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이승철이지만 김태원의 식견이 아니었더라면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김태원은 이같이 보컬을 발굴하는 데도 남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사랑할수록’의 고 김재기, ‘Lonely Night’의 박완규 그리고 최근 11집의 정동하까지 많은 보컬이 부활을 거쳐 갔다.

한국 록의 황금기에 태어나 최고의 대중적 지지를 얻었던 부활. 이들은 록과 정반대에 서있던 소녀팬들까지 록의 영역으로 초대했고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라이브를 꽃피우게 했다. 그리고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지치지 않는 활동으로 대한민국 록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부활’ 프로필

·결성 : 1985년

·구성원 : 정동하(보컬) 엄수한(키보드) 서재혁(베이스) 김태원(기타) 채제민(드럼)

·주요 활동

-1986년 1집 ‘부활 Vol1 : 희야’

-1987년 2집 ‘회상’

-1993년 3집 ‘기억상실’

-1995년 4집 ‘잡념에 관하여…’

-1997년 5집 ‘불의 발견’

-1999년 6집 ‘理想 시선’

-2000년 7집 ‘Color’

-2002년 8집 ‘새,벽’

-2003년 9집 ‘Over the Rainbow’

-2005년 10집 ‘서정’

-2006년 11집 ‘사랑’

〈황정|음악동호회 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선정 기획|가슴 네트워크〉
-청춘, 풋풋한 떨림의 공명-

너무나 뛰어난 데뷔 앨범은 가끔 주객이 전도되어 뮤지션의 미래를 지배한다. 결코 게으르거나 무성의하지 않았던 지난 20년에도 불구하고 김현철을 이야기할 때에는 누구라도 첫 앨범 ‘춘천 가는 기차’로 운을 떼고 시작한다. 자신의 정규 앨범은 물론이고 어린이들을 위한 키즈팝이며 각종 서브 프로젝트들까지 소화하고 있는 김현철에게 이 데뷔 앨범은, 그래서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다.

들국화나 김현식, 신촌블루스나 봄여름가을겨울로 기억되는 ‘동아기획’에서 나온 앨범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 조용히 움틀대던 가요계의 퓨전 재즈 바람에 대한 의식 때문에 이 앨범을 퓨전 재즈계의 신동이 만들어낸 앨범으로서 높게 평가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시선에서 굳이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도 억지일 것이다. 이 앨범이 재즈적 화성과 스타일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장르적 구분이 아니다. 형식을 빌려왔을지언정, 그 안에 묻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앨범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은 한 뮤지션의 가장 섬세하던 시절의 감각과 감성이다. 그리고 그 감성은 놀랍게 지금도 유효하다. 김현철을 ‘혜성같이 나타난 천재’로 박제시킨 이 ‘저주 받은 걸작’은, 시간의 물리적인 흐름을 거부하듯 여전히 숨 막히도록 싱싱하다.

자칫 단순히 신선한 음악의 등장으로만 치부될 수도 있었던 이 앨범의 매력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역시 노련한 선배들의 몫이다. 조동익·함춘호·손진태 등의 일류 연주자들의 손끝에서 뽑아져 나오는 깊이 있는 울림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이의 펄떡이는 치기를 부드럽고 두껍게 받쳐준다. 앨범 곳곳에서 ‘어떤날’의 조동익의 향취가 묻어나는 것은, 김현철의 초기 음악의 정신적 지주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푸근한 공기가 조용히 앨범을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아마추어의 신선함과 프로의 노련함이 함께 조화된 데뷔 앨범이라니. 이보다 더한 낙원이 존재할 수 있을까.

혹여 있을지 모를 재즈, 천재라는 단어들에 뜻 모를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에게도, 이 앨범의 노랫말들은 충분한 공감의 대상일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혹은 일기장 구석에 써놓은 듯한 노랫말은, 만든 이와 듣는 이의 거리를 뺨이 닿을 듯 가깝게 만들어 주는 재주를 부린다. 머릿결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고(‘오랜만에’), 자신이 살아온 동네 구석구석의 풍경들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흥얼대고(‘동네’),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이나 비를 보며 감상에 젖는다(‘눈이 오는 날이면’ ‘비가 와’). 듣고 있다 보면 어느 새 가슴 한 구석이 두근거려 오는 우리네 청춘의 일상이다.

한 음 한 음, 설렘을 담아 쓰고, 연주하고, 노래한다. 이 앨범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며 힘이다. 이 데뷔 앨범이 아직 활발히 활동 중인 김현철에게는 지워버리려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짙어지는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어떠랴. 대한민국의 노래를 사랑하는 푸른 청춘들은 모두, 사춘기를 겪듯이 이 앨범을 통과해 나갈 것이다. 앨범의 첫 트랙 ‘오랜만에’가 시작되며 밀려오는 이 앨범의 풋풋한 떨림은, 세월을 덧입혀 가면서 더욱 강한 향기를 자아낼 것이 분명하다.


◇김현철 프로필

·출생 : 1969년

·데뷔 : 1989년

·주요 활동

-1989년 1집 ‘김현철 Vol.1’

-1992년 교통사고 이후 활동 재개, 2집 ‘32℃ 여름’

-1993년 영화 ‘그대 안의 블루’ OST, 3집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 달의 몰락’

-1994년 영화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 끝난건가요’ OST

-1995년 4집 ‘김현철 Ⅳ’

-1996년 5집 ‘冬夜冬朝’

-1998년 6집 ‘김현철 6집’

-1999년 7집 ‘어느 누구를 사랑한다는 건 미친 짓이야’

-2000년 영화 ‘시월애: must say good-bye’ OST

-2002년 8집 ‘…그리고 김현철’

-2004년 ‘키즈팝 1집’

-2006년 9집 ‘Talk about Love’/‘키즈팝 2집’/ 디지털 싱글 ‘우리 이제 어떻게 하나요’

-2007년 주식회사: 디지털 싱글 ‘좋을 거야’

〈김윤하|웹진 가슴 편집인〉
-시화전 보는 듯 격조있는 사랑노래-

▲16위 이문세 ‘이문세 4’(1987/서라벌레코드)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빛바래지 않은 사진과 같은 음반이 있다. 정치·사회적 격동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 대중음악도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었다.

뭐에 홀린 듯 한꺼번에 출현한 명반들과 새로운 창작자들에 의하여 음악마니아들 중 다수가 우리 음악으로 돌아서고, 팝송 위주의 라디오 편성구도는 역전된다. 그 복판에 이문세와 이영훈이 있었고, ‘이문세 4: 사랑이 지나가면’이 있었다.

신중현, 이정선 등 여러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았던 이문세는 ‘이문세 3: 난 아직 모르잖아요’(1985)에 앞서 엄인호의 소개로 젊은 작곡가를 만난다. 이영훈이었다. 그리고 다음 앨범 ‘이문세 4: 사랑이 지나가면’은 모두 그의 곡들로 채워지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화성적인 안정성과 구조적인 완결성을 중시한 이영훈은 클래식과 팝을 접목하고 새로운 조류를 수용했으며, 시적이고 회화적인 대중음악을 제시했다. 격이 있는 사랑노래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 과잉과는 거리를 둔 이문세의 분절적이고 절제된 창법이 맞물렸다. 이와 같은 가수와 작곡가의 이상적인 결합에 의하여 다시금 작곡가가 조명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풍부한 성량이나 가창력 등의 기교가 좋은 가수의 조건이 아님도 확인된다.

서정적인 발라드 ‘사랑이 지나가면’에서부터 현악연주가 두터운 붓이 된 ‘밤이 머무는 곳에’와 남녀 듀엣의 전형이 된 ‘이별 이야기’는 지금의 기준에서도 세련된 화법을 취했다. 신스 팝과 록을 반영한 ‘그대 나를 보면’과 포크송 ‘가을이 오면’ 등은 저마다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엔 음반의 A면과 B면에 다른 무게를 두곤 했지만, B면의 ‘깊은 밤을 날아서’와 ‘슬픈 미소’, 그리고 ‘굿바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악성과 대중성을 겸하고 있었다. 무그와 같은 색감 있는 악기의 이용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세션은 앨범을 더욱 수려하게 색칠했으며, 편곡을 맡은 김명곤은 이영훈 못잖은 비중으로 기여했다. 이렇게 탄생한 곡들 대부분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청곡 차트를 점령했고, 음반의 판매고는 기록적이었다.

이 모든 장점들의 정점이자 가요사의 명곡인 ‘그녀의 웃음소리뿐’으로 대미를 장식한 ‘이문세 4: 사랑이 지나가면’은 대중가요의 완성도를 한 차원 끌어올린 작품이 되어 주류가요의 질적 성장을 견인했다. 그리고 팝송세대가 가요세대로 전환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공헌한다. 또한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한 앨범이 그에 상응하는 성과까지 얻어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관된 흐름 안에 다양성을 녹여낸 ‘앨범’을 지향하여 ‘웰-메이드’의 교과서가 됨으로써 1980년대 대중음악의 부흥이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에서 함께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는 결과물이다.

이문세는 음반과 공연, 라디오에 활동기반을 두고 전담 작곡가 체제로 음반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과 다른 선상에 있으면서도 TV 가수들과는 차별화하는 전략이었다. 이영훈의 곡들 역시 주로 이문세의 앨범에서 듣게 되는 희소성의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지를 소모해버리고 화석화되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라디오와 TV의 역할과 위상에 대하여 다시금 짚어보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20년 전, 선곡은 물론 곡의 배열까지도 완벽한 가요-팝 앨범이 태어났고, 어느 가수와 작곡가는 그렇게 세대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이문세 프로필·출생 : 1959년

·데뷔 : 1978년 (CBS ‘세븐틴’ MC로)

·주요활동

-1983년 이문세 1집 ‘나는 행복한 사람’

-1984년 이문세 2집 ‘The Best: 그때 그랬어야’

-1985년 이문세 3집 ‘이문세 3: 난 아직 모르잖아요’

-1987년 이문세 4집 ‘이문세 4: 사랑이 지나가면’

-1988년 이문세 5집 ‘이문세 5: 시를 위한 시’

-1989년 이문세 6집 ‘이문세 6: 그게 나였어’

-1991년 이문세 7집 ‘이문세 ●: 가을이 가도’

-1993년 이문세 8집 ‘LEE MOON SAE: 오래된 사진처럼’

-1995년 이문세 9집

‘Stage with Composer Lee Younghun: 후회’

-1996년 이문세 10집 ‘花舞: 조조할인’

-1998년 이문세 11집 ‘Sometimes: 내 마음 속의 너를’

-1999년 이문세 12집

‘休=사람과 나무 그리고 쉼: 슬픈 사랑의 노래’

-2001년 이문세 13집 ‘Chapter 13’

-2002년 이문세 14집 ‘빨간 내복’

〈나도원|웹진 가슴 편집인〉

〈선정 기획|가슴네트워크〉
-성찰에서 뿜어나온 철학을 부르다-

▲15위 장필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1997/킹레코드)

1960년대 말 ‘앨범(작품으로서의 음반) 아티스트’로서 신중현이, ‘싱어 송라이터’로서 한대수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한국대중음악사는 ‘남성 아티스트들의 세상’이었다. 적어도 86년 한영애가 정규 1집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여성 아티스트로서 한영애가 80년대 말을 혼자서 고군분투했다면, 90년대 들어서서 한영애와 함께 이상은, 장필순의 트로이카 체제가 형성되었다. 여기서는 ‘아티스트’를 거론하니 만큼 당연히 ‘창작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 여성 뮤지션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형도는 현재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2000년대 들어서서 주목할 만한 여성 싱어 송라이터로는 오소영(‘기억상실’ 2001), 뭄바트랩의 조연희(‘Looking For The Sunrise’ 2006), 임주연(‘Imagination’ 2007), 지은(‘지은’ 2007) 정도가 배출됐을 뿐이다.

이런 귀하디 귀한 여성 송라이터 진영에서 장필순은 매우 독특하고 의미 있는 존재이다. 먼저 얘기할 것은, 장필순은 한영애처럼 솔로 활동 시작부터 대중을 휘어잡고, 동료 뮤지션들에게 강한 존재감을 부여한 뮤지션이 아니었다. 또한 이상은처럼 스스로 보헤미안이 되어서 세상을 떠돌며 각고의 노력과 성찰을 통해서 아티스트로 다시 태어난 경우도 아니었다. 장필순은 82년 대학연합서클인 ‘햇빛촌’에서 김선희를 만나 ‘소리두울’이라는 듀엣을 결성하고, 84년 컴필레이션 앨범 ‘캠퍼스의 소리’에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88년 소리두울 1집 발표 후 89년에 김현철의 프로듀싱으로 ‘어느새’가 담긴 솔로 데뷔 음반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97년에 5집인 이 앨범을 발표하기 전까지 긴긴 세월 동안 장필순은 단지 ‘노래 잘하는 여자 가수’ 정도였지 그 누구도 ‘거장’으로 우뚝 설 것이란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녀의 그런 위상은 2002년에 발표한 6집인 ‘Soony6’이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공고해졌고, 지금은 유일하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여성 뮤지션으로 홀로 남았다. 그래서 매우 독특한 존재라는 것이다.

장필순의 현재 음악은 그녀의 나이에 비례해서 성숙한 정도가 아니라 철학자의 그것처럼 깊어졌는데, 이는 “희로애락이라는 게 구분이 잘 안 가는 것 같다. 이제는 기쁠 때와 슬플 때, 내가 힘들어 할 때가 결국엔 다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녀의 삶의 성찰을 통한 언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성찰이 담긴 음악은 바로 5집인 본 앨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6집에 와서 완성되었다. 이는 현재 한국대중음악에서, 특히 여성 뮤지션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이 음반은 3집 이후 조동익과 같이한 음악 작업의 결과가 완벽하게 그 결실을 맺었음을 보여주었다. 조동익 밴드(조동익, 함춘호, 윤영배, 박용준, 김영석)의 세션은 조동익, 윤영배, 장필순이 공동으로 작업한 곡들에 너무도 역동적으로 매치되고 있다. 세션 진행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입부의 ‘첫 사랑’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제외하고는 이전과 달리 박용준의 키보드 연주가 없는 심플한 록 밴드 세션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점이 장필순 노래에 역동적인 힘을 부여했고, 메시지 전달력을 향상시킨 측면이 있다. 그 결과가 장필순의 자작곡 ‘그래!’ ‘넌 항상’ ‘사랑해 봐도’ 등에서 드러난다. 장필순은 자신의 5집 노래에 대해서 “그 곡들은 희망이 담겨 있긴 하지만 현실의 버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는 나의 느낌이자 색깔이다”라고 말했다.

조동진으로 시작해서 어떤날, 시인과 촌장 등으로 이어졌던 80년대 언더그라운드 포크 뮤지션 부류는 지금의 조동진, 조동익, 장필순 등의 ‘하나뮤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하나뮤직 최후의 보루가 이제는 장필순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앞서 그녀를 ‘의미 있는 존재’라고 얘기한 것이다.

◇장필순 프로필

·출생 : 1963년

·데뷔 : 1982년

·주요 활동

-1982년 여성 듀오 ‘소리두울(장필순, 김선희)’ 결성

-1982년 ‘캠퍼스의 소리’ ‘햇빛촌’ 음반 발매

-1987년 옴니버스 ‘우리노래전시회 2집’ 참여

-1988년 ‘소리두울’ 앨범 출시

-1988년 오석준, 박정운과 ‘오·장·박’ 앨범 발매

-1989년 장필순 1집 ‘어느새’

-1991년 장필순 2집 ‘외로운 사랑’

-1992년 장필순 3집 ‘이 도시는 언제나 외로워’

-1995년 장필순 4집 ‘하루’

-1997년 장필순 5집 ‘첫사랑’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gaseum.co.kr〉
시인과 촌장의 두 번째 앨범 ‘푸른 돛’은 어른들을 위한 동요다. 고민과 그리움이 함께 하며 섬세한 파장을 만들어낸다. 1985년 발표된 들국화의 데뷔 앨범이 80년대 초반부터 발아했던 언더그라운드의 포효라면 1년 후 등장한 이 앨범은 언더그라운드의 성찰이자 번뇌다. 사회와 직접적으로 맞닿으며 부대끼던 그 이전의 모던 포크와는 달리, 맞닿되 피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이 앨범은 담고 있다.

80년대라는 시기 못지 않게, 하덕규의 성장기도 상처투성이였다. 초등학교 때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고 아버지의 사업실패를 겪었다. 고등학교 때는 여러 번 가출을 해서 고향인 설악산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미대에 입학한 건 몇 번의 좌절을 겪은 후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가 그리워한 것은 고향인 동해바다였다. 그 곳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은 그의 이상향이었다.

그는 미술 못지 않게 음악을 좋아했다. 중3때 손에 넣은 기타를 독학으로 익히고, 훗날 화실을 경영하며 틈틈이 작곡을 했다. 서영은의 단편 제목에서 따온 시인과 촌장을 결성하고 81년 첫 앨범을 냈다. 그러나 기획사의 횡포로 그의 본래 의도는 사라지고 상업적 결과만이 남았다. 하덕규는 음악산업계를 떠나려 했다. 현실에서 적응할 수 없어 예술로 피했지만 돈이 결부된 예술은 더 이상 그의 은신처가 아니었다. 설악산에 올라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 때 만든 노래가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이다. 그 무렵 교류하던 김민기, 김창완, 전인권 등 새로운 음악을 모색하고 있던 뮤지션들과의 만남이 그에게 계속 음악을 하게 했다. 84년 함춘호를 만나며 다시 시인과 촌장을 시작했다. 다음해 컴필레이션 ‘우리 노래 전시회 1집’에 수록한 ‘비둘기에게’가 라디오를 중심으로 사랑 받으며 86년 ‘푸른 돛’을 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산실이자, 유일한 해방구였던 동아기획을 통해서다. 모든 노래를 하덕규가 만들고 함춘호는 연주를 맡았다.

이 앨범을 낼 당시에도 하덕규는 행복하지 않았다. 줄담배를 피워대고 위스키를 마셔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을, 하덕규는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는다. 서정적 은유만으로, 노래한다. ‘푸른 돛’ ‘고양이에게’ ‘사랑일기’ ‘진달래’ 같은 동화 속 단어들의 제목은 그에 걸맞은 단어들로 이뤄진 가사와 함께 엮인다. 하덕규는 고해성사대에 선 소년처럼 파르라니 떨리는 목소리로 그 단아한 단어들을 노래한다. 스스로의 괴로움을 잊고자 애써 뽑아냈을 밝고 차분한 멜로디들은 함춘호의 기타 연주와 함께 서정성의 극치를 획득한다. 하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건 괴로움이다. 가사의 행간에는 지금은 없는 희망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그런 답답함은 결국 마지막 곡 ‘비둘기 안녕’에서 폭발하고야 만다. 노래의 중반부, 그는 그동안의 미성을 벗어던지고 일그러진 목소리로 “비둘기 안녕”이라 외친다. 비둘기는 이 앨범에서 가장 자주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존재다. 결국 그는, 앨범의 화자는 희망을 찾는 데, 구원 받는 데 실패한 것이다. 함춘호도 빛나는 기타 솔로로 그런 울분에 힘을 더한다. 흔히 ‘푸른 돛’과 시인과 촌장은 80년대 서정주의 포크의 대표작이라고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이 앨범의 가치는 그런 단순한 문장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고양이’의 조바뀜 부분, ‘진달래’의 은근한 엘레지, 그리고 ‘비둘기 안녕’은 이 앨범을 은유와 억압과 해방의 서사로 자리매김하기 충분하다. 한 시대의 양지와 음지가 이 앨범에 묻어있다.

▶‘시인과 촌장’ 프로필

·결성 : 1981년

·구성원 : 하덕규(보컬)/함춘호(기타)

·주요활동

-1981년 1집 ‘시인과 촌장: 짝사랑/님타령’ 발매

-1986년 2집 ‘시인과 촌장: 푸른돛/사랑일기’ 발매

-1988년 3집 ‘숲’ 발매

-1991년 베스트 음반 ‘1981-1991 Best’ 발매

-1997년 베스트 음반 ‘Best’ 발매

-2000년 4집 ‘The Bridges’ 발매

-2001년 라이브 앨범 ‘12년 만의 만남(Live)’ 발매

〈김작가|음악평론가/선정 기획|가슴네트워크〉
김현식은 들국화의 전인권과 함께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였다. 들국화가 ‘그것만이 내 세상’을 소리쳐 부르고 있을 때 그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부르며 인기를 얻었다. 80년 첫 앨범을 냈을 때 그는 그냥 가능성 있는 보컬리스트였을 뿐이었다. 그의 첫 자작곡이었던 ‘당신의 모습’과 ‘떠나가 버렸네’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김현식이라는 이름 석 자가 대중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사랑했어요’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면서부터였다. 그 때부터 그는 ‘얼굴 없는 가수’라 칭해지며 언더그라운드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등의 노래들이 히트했던 이 두 번째 앨범을 김현식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튜디오 세션맨들이 주도해 만든 앨범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김현식은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 결심을 했다.

지금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봄여름가을겨울’은 애초 2인조가 아니었다. 김현식은 자신의 밴드를 만들고자 젊은 뮤지션들을 수소문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밴드가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었다. 기타 김종진, 베이스 장기호, 키보드 유재하(후에 박성식으로 교체), 드럼 전태관으로 이루어졌던 이 대단한 밴드는 김현식의 세 번째 앨범을 함께 만들게 된다. 비록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백 밴드의 형태였지만, 앨범의 기획과 제작, 녹음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확실한 하나의 밴드였다. 당시 록과 블루스 외에 퓨전 재즈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현식은 김종진과 장기호 등의 의견을 많이 배려해주었고, 그럼으로써 앨범은 완전한 밴드의 색깔을 띠고 만들어졌다.

김현식은 단순히 연주뿐이 아니라 밴드의 멤버들이 함께 곡 작업에도 참여하길 원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앨범의 완성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박성식이 만든 ‘비처럼 음악처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종진의 ‘쓸쓸한 오후’, 장기호의 ‘그대와 단둘이서’,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등은 앨범의 완성도와 함께 다채로움을 부여했다. 김현식 역시 ‘빗속의 연가’ ‘눈 내리던 겨울밤’ 등의 뛰어난 노래들을 만들며, 그가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아니란 사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앨범을 가장 빛나게 해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김현식의 보컬이었다. 이 앨범에서부터 완연하게 거칠어지기 시작한 김현식의 목소리는 ‘빗속의 연가’나 ‘비오는 어느 저녁’ 같은 블루스 스타일의 곡들에서 더욱 빛을 발했으며, ‘비처럼 음악처럼’ ‘눈 내리던 겨울밤’에서 보여준 김현식만의 ‘소리 지르기’는 그가 얼마나 훌륭한 보컬리스트였는지를 그대로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앨범은 20만장 이상을 판매하는 큰 성공을 거두며 그를 들국화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진영의 양대 산맥으로 만들어줬다. 하지만 그의 마약 복용 등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전성기는 짧게 끝나버렸고 밴드 멤버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진다. (김종진과 전태관은 봄여름가을겨울로, 유재하는 솔로로, 장기호와 박성식은 사랑과 평화를 거쳐 빛과 소금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그는 모두가 아는 대로 투병 생활과 재기를 반복하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에겐 ‘가객(歌客)’이란 호칭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손님처럼 이 세상에 들렀다가 노래를 남겨두고 떠났다. 김현식만큼 가객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가수는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 앨범은 바로 그 가객이 남기고 간 가장 가치 있는 기록이다.

▶김현식 프로필

·출생 : 1958년

·데뷔 : 1980년

·주요활동

-1980년 김현식 1집 발매

-1984년 김현식 2집 발매

-1985년 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 조직

-1986년 김현식 3집 발매

-1987년 마약상용 혐의 구속

-1988년 삭발한 채 재기 콘서트

-1988년 김현식 4집 발매

-1990년 김현식 5집과 ‘신촌블루스’ 3집 동시 발매

-1990년 11월 1일 사망

-1991년 63빌딩에서 김현식추모콘서트 열림

-1991년 김현식 6집 발매

-1996년 김현식 7집 발매


〈김학선|웹진 가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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