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100대 명반]30위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Ⅱ’
입력: 2007년 12월 06일 09:50:44
우리가 서태지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의 그물망을 탁 던지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재빨리 피해버린다. 다시 한 번 던지면서 그가 걸려들기를 희망해보지만 어느새 그는 저 너머로 건너가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시종일관 무차별 변신으로 일관해온 대중음악의 순례자. 이것이 우리가 서태지에 대해 갖고 있는 첫 번째 이미지일 것이다.

따라서 서태지의 앨범들 중 어떤 것이 최고인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태지 신화의 개막을 선포한 데뷔작을 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서는 국악과의 접목이라는 이유를 들어 2집을 거론한다.

이와 동시에 대각선 한편에서는 사회비판적 시선이 녹아든 3집을 명예의 전당에 봉헌하고, 그 맞은편에서는 가출 청소년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4집을 얘기한다. 이것 참 난감한 일이다. 그러나 굳이 하나의 작품만으로 서태지의 모든 현상을 집적해 설명해야 한다면 본 2집이 가장 제격일 것이다.

이 앨범은 ‘서태지 신드롬’을 이 땅에 공포한 선언문이었다. 사람들은 이 충격의 음반을 접하고 1년 전의 ‘난 알아요’라는 외침이 단발성 블록버스터가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이처럼 6개월 이상의 공백을 우려했던 사람들에게 또 한 번의 멋진 임팩트를 선사한 서태지는 자신의 가치를 재입증하며 가요계의 맹주로 우뚝 섰다. 서태지 신화의 진정한 출발을 고하는 방아쇠가 비로소 당겨진 것이었다.

1집을 통해 가요계의 물줄기를 댄스로 돌려놓았던 그가 앨범에서 꺼내든 카드는 ‘록’이었다. 그의 음악적 시원(始原)이 메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놀라울 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가 TV 출연에서 첫 상연한 ‘하여가’는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획기적인 곡이었다. 격렬한 일렉트릭 기타 솔로가 1분이나 곡 중간에 첨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전 가요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던 패턴이었다. 이 지점에서 그의 아티스트적 고집이 빛을 발했다.

곡에서 더욱 놀라웠던 것은 국악기인 태평소를 삽입해 우리만의 흥취를 살린 것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국악기의 사용은 메탈 기타의 상승 기운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면서 충일한 분위기를 죽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당시 말 만들어내기 좋아했던 사람들은 ‘동과 서의 완벽한 퓨전’ 등의 미사여구를 동원해 곡을 찬양했다.

‘하여가’의 비중이 크긴 했지만 곡들의 탁월성은 다른 곳들에서도 두드러졌다. 언제나 라이브 무대 마지막을 달궜던 ‘우리들만의 추억’, 이후의 테크노 열풍을 예견한 ‘수시아’, 발라드 수작 ‘너에게’, 음산한 기운을 방사한 앨범의 비기(秘技) ‘죽음의 늪’ 등이 그 면면들이었다.

서태지는 이후 얼터너티브 록, 힙합, 하드코어 등으로 마차를 갈아타며 대중들의 예상을 빈번히 뛰어넘었다. 이처럼 그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공간에서 민첩하게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지금도 어디론가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적어도 주류 음악 필드 내에서는 그렇다.

앨범은 그처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의 경력의 단락들이 모순되지 않는 새로운 의미의 흐름 위에 질서 잡혀질 것임을 처음으로 증명한 쾌작이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요 시장은 이만한 파급력을 지니는 작품을 주조하지 못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프로필

·결성 : 1991년

·구성원 : 서태지(보컬, 랩)

양현석(보컬, 랩) 이주노(보컬, 랩)

·주요활동

-1992년 1집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환상 속의 그대’

LIVE & TECHNO REMIX

라이브 음반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

-1993년 2집 ‘Seotaiji and Boys Ⅱ: 하여가/우리들만의 추억’

라이브 음반 ‘93 마지막 축제’

-1994년 3집 ‘SEOTAIJI AND BOYS Ⅲ: 발해를 꿈꾸며/교실이데아’

-1995년 싱글 ‘서태지와 아이들: 필승/GOODBYE’

라이브 음반 ‘95 다른 하늘이 열리고’

4집 ‘Seotaiji and Boys Ⅳ: 슬픈 아픔/필승/Come Back

Home’

-1996년 베스트 음반 ‘Goodbye Best Album’

공식 해체

싱글 ‘시대유감’

〈배순탁|웹진 IZM 필자〉
[대중음악 100대 명반]29위 조용필 ‘조용필 1집 ’
입력: 2007년 12월 06일 09:50:58
1980년대의 대중음악계에서 조용필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를테면 물고기에서 아가미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제주도에서 한라산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없으면 그것이 아니게 되는 바로 그것. 조용필이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서 갖고 있는 ‘존재 지분’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용필은 모두에게 사랑받았다(이 때 ‘모두’란 단지 수사법이 아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를 드러내놓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였고, 컬러TV 시대 최초의 슈퍼스타였으며, 약 10년 동안을 도전자 없는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 조용필 신화의 시작이 바로 이 음반이다. 이 음반이 만든 수많은 기록들에 대해 다시 언급하는 것은 지면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음반이 조용필의 음악적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의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고자 한다.

외적인 흥행 기록을 떠나 조용필의 이 음반은, 음악적인 측면과 전략적(상업적)인 측면에서 조용필이 나아가게 될(그리고 실제로 나아간) 방향을 완성된 형태로 제시한 음반이다. 우선 음악적인 측면.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음반은 조용필 ‘최초의’ 음반이 아니다. 그는 72년부터 다수의 음반을 내고 활동을 했으며, 76년에 발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기록한 뜻밖의 히트로 인해 영광과 몰락의 시기를 겪은 바 있다. 80년대에 ‘부활’하기 전까지 그는 포크 송, 그룹사운드 록, 트로트, 민요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배경을 이미 쌓아두었고, 이는 이 음반에서 조용필의 독특한 목소리와 함께 종합적 형태로 모인다. 즉 이 음반에는 애절한 발라드(‘창밖의 여자’), 경쾌한 록(‘너무 짧아요’), 트로트(‘돌아와요 부산항에’), 민요(‘한오백년’)가 고루 들어가 있다. 거기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신시사이저를 사용한 뿅뿅거리는 디스코(‘단발머리’)까지, 조용필은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패를 올려놓는다.

다음으로 전략적 측면. 이는 음악적 측면에서 파생된 것으로, 조용필 음반의 ‘백화점식 구성’은 결과적으로 연령과 세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계기가 될 수 있었(고 그것이 먹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조용필에게 ‘아티스트로서의 일관성’이 부족했다고 비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그 비판은 당시의 음악산업 시스템 속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부분과 할 수 없었던 부분을 적절히 고려하고 난 뒤에 가능할 것이다. 다른 종류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대중음악은 특히 자신이 속한 바로 그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필의 이 음반은 80년대 대중음악의 가장 환하게 빛나는 산물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그때 그 시절이 너무 어두웠거나.

PS. 이 음반에 대한 글은 당시 발매되었던 LP를 기준으로 작성했음을 밝힌다. LP와 CD에 실린 곡의 목록에는 차이가 없지만 순서가 일부 바뀌었으며(예를 들어 ‘단발머리’는 LP의 B면 첫 곡이다. LP로 들을 때는 이러한 곡 배치가 A면 첫 곡인 ‘창밖의 여자’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LP에는 건전가요(군가 ‘너와 나’)가 수록되어 있다.

◇조용필 프로필

·출생 : 1950년

·데뷔 : 1972년

·주요활동

-1980년 1집 ‘趙容弼 대표곡 모음: 창밖의 여자/단발머리’

-1980년 2집 ‘趙容弼 VOL.2: 축복(촛불)/외로워 마세요’

-1980년 3집 ‘趙容弼 제3집: 미워 미워 미워/여와남’

-1982년 4집 ‘조용필: 못찾겠다 꾀꼬리/비련’

-1983년 5집 ‘조용필: 산유화/여자의 정’

-1984년 6집 ‘조용필 6집: 바람과 갈대/그대 눈물이 마를 때’

-1985년 7집 ‘趙容弼 7集: 눈물로 보이는 그대/들꽃’

-1985년 8집 ‘趙容弼 Vol.8: 허공/킬리만자로의 표범’

-1987년 9집 ‘87 사랑과 인생과 나!: 마도요/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1988년 10집 ‘조용필 제10집 Part. Ⅰ: Seoul Seoul Seoul/서울 1987년’

-1989년 11집 ‘조용필 제10집 Part. Ⅱ: Q/눈이 오면 그대가 보고 싶다’

-1990년 12집 ‘90 VOL. 1 SAILING SOUND: 추억 속의 재회’

-1991년 13집 ‘THE DREAMS: 꿈/아이마미’

-1992년 14집 ‘CHO YONG PIL 14: 슬픈 베아트리체’

-1994년 15집 ‘CHO YONG PIL 15: 남겨진 자의 고독’

-1997년 16집 ‘eternally CHO YONG PIL 16: 그리움의 불꽃’

-1998년 17집 ‘AMBITION: 친구의 아침/작은 천국’

-2003년 18집 ‘Over The Rainbow: 珍/태양의 눈’

〈최민우|웹진 weiv 편집위원〉
[대중음악 100대 명반]28위 작은거인 ‘작은거인 2집’
입력: 2007년 11월 29일 10:10:04
‘작은 거인’은 1979년에 처음 열린 ‘대학가요 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데뷔한 밴드다. ‘대학가요 경연대회’ 본선 무대는 물론, 당시 캠퍼스 밴드들이 자주 출연하던 MBC의 ‘영 11’이나, KBS의 ‘젊음의 행진’과 같은 프로그램들에서 보여준 김수철의 빠른 손놀림, 또 AC/DC의 앵거스 영(Angus Young)과 척 베리(Chuck Berry)의 걸음걸이에서 착안한 도발적인 스테이지 매너는 해외의 록 음악을 비교적 일찍 섭취한 세대가 보기에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파격’을 음반으로 옮기기에 당시 우리가 가진 기술은 너무나 미약했다.

같은 해 발표된 첫 번째 음반 ‘작은 거인의 넋두리’에 수록된 이들의 사운드에는 밴드 고유의 개성이 거세돼 있다. 물론 이후 김수철의 솔로 음반에 다시 수록되어 히트했던 ‘내일’이 수록되었고, 요즘 활동하는 록밴드 ‘스핑크스’도 무대에서 한 번씩 연주했던 ‘야속한 사람아’와 같이 실험적 트랙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뮤지션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어중간한 음반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자켓의 사진, 멤버들은 자지러지게 웃고 있지만 실상 그 마음은 반대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에 반해 2년 후 발매된 두 번째 음반의 뒷면에는 두 멤버의 무섭도록 비장한 표정이 흑백사진으로 담겨 있다. 어쩌면 ‘산울림’이나 ‘사랑과 평화’처럼 첫 등장부터 청자들의 허를 찌르며 순식간에 국내 록의 개척자 자리에 등극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첫 번째 음반의 예정된 실패에 대한, 또 그런 저런 이유로 함께했던 음악 동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나머지 멤버들의 마음가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보인다.

작은 거인의 두 번째 앨범은 국내 록의 마스터피스 가운데 하나로 손꼽기에 충분한 음반이다. 이전의 음반을 통해 보여준, 록 음악에 취약했던 국내 녹음의 취약점은 일본인 엔지니어 지다가와 마사토의 손을 거쳐 록 본연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여타 캠퍼스밴드의 자작곡 넘버들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곡 자체의 수준도 외국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격상되었다.

2인조로 축소됐지만 김수철의 베이스, 기타 오버더빙에 의해서 밴드로서의 기본적인 틀을 갖추고 있으며, 최수일의 드럼 연주 또한 그때까지 보기 힘들었던 전문 록 드러머로서의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물 만난 물고기 같은 김수철의 기타 연주는 왜 이 음반을 국내 록의 마스터피스로 꼽느냐에 충분한 해답이 되어준다. 김수철식 ‘국악가요’를 실험대에 올리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별리’를 비롯해서 어느 곡 하나 빼놓을 수 없지만, 공연시 컵을 이용한 슬라이드주법을 선보였던 ‘새야’, 마우스 튜브를 이용한 전주, 또 마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 뒤에 기타를 걸치고 연주했던 ‘알면서도’, 간주부분을 이빨로 연주하던 ‘일곱 색깔 무지개’ 등은 한국 록이 낳은 빛나는 보석이다.

물론 신중현이나 김홍탁과 같은 선구자들 덕택에 국내에 록 음악이 생겨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작은 거인과 같은 밴드가 있었기에 우리의 록 음악은 ‘진보’할 수 있었다. 이후 몇 차례의 멤버 교체 후 작은 거인은 해산하고 김수철은 솔로로, 최수일은 케이블 방송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게 된다.

◇작은거인 프로필

·결성 : 1979년

·구성원 : 김수철(보컬, 기타, 베이스) 최수일(드럼)

·주요활동

-1979년 1집 ‘작은 거인의 넋두리: 호랑나비/바람개비’

-1981년 2집 ‘작은 거인: 별리/어쩌면 좋아’

〈송명하|월간 핫뮤직 수석기자〉
[대중음악 100대 명반]27위 노이즈가든 ‘Noizegarden’
입력: 2007년 11월 29일 10:10:00
작렬하는 슬로 템포의 기타 리프, 선명하게 반짝이는 심벌, 그리고 육중하게 던져지는 베이스, 거기에 주문을 거는 듯 힘줘 내뱉는 보컬. 출력과 토크가 이상적으로 배합된 엔진이 뿜어내는 배기음. 스피드보다는 그 힘을 따라갈 자가 없는 자동차. 천천히 다가오고 있지만 아무도 막아낼 자가 없는 전사. 1996년 노이즈가든(Noizegarden)이 새 앨범을 냈을 때, 아직도 헤비메탈의 용광로 속에서 헤매고 있던 수많은 록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가장 대안적인 동시에 또한 가장 교과서적인 록 음악의 등장, 마치 한국 록의 리셋 버튼을 눌러버린 듯한 느낌의 음반이 등장한 것이다.

노이즈가든은 밴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헤비메탈 그룹 ‘사운드가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사에서 멈추지 않고 블랙 사바스, 혹은 레드 제플린 등의 정통 록 음악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록의 문법을 제시했다.

당시 한국 록 음악은 명절 외국인 장기자랑의 ‘아리랑’ 수준인 ‘흉내’를 갓 넘어 영문 가사에 의존한 밴드들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전곡 한글 가사로 무장해 본격적인 한국 록의 시대를 증거한 그들은 멤버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호명해야 할 가치가 있다.

보컬리스트 박건은 한국 록 영역에서 보기 드물게 중저음역대가 안정돼 있으며 고음에 이르기까지 강하면서도 안정된 음색을 지니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베이시스트 이상문은 결코 앞서나가거나 경박스러운 리듬을 짚지 않았으며 이 중량감 강한 음반의 큰 기둥을 이루고 있다. 드러머 박경원은 때로는 연타로, 때로는 절분음으로, 때로는 침착한 정박으로 흥분과 우울이 오가는 리듬 트랙을 구성했다. 기타리스트 윤병주는 선명하게 들려오는 솔로, 순간적으로 폭발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타오르기도 하는 옥탄가의 리프, 거기에 온갖 톤의 실험까지 해가며 악곡 전체를 지배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12트랙은 그야말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어느 계보와도 섣불리 엮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지속성 강한 기타 줄의 공명과 보컬의 거친 절규가 만나 웅장한 슬로 템포로 다가오는 ‘기다려’를 통해 이들의 무표정하지만 흥분을 감추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한 멜로디 라인과 단순한 듯하지만 다양한 변주의 편곡으로 무장하고 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에서는 이들이 지닌 의외의 유연성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 ‘우주 꽃사슴’의 유머감각에 가까운 환상성과 ‘말해봐’의 스트레이트함을 겪고 나면 느리게 달리지만 위험한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는 듯한 심장 박동을 느끼게 된다. 가장 헤비메탈의 느낌에 근접해 있지만 메탈이 지닌 단점을 우회하고 있는 ‘묻지 말아줘’를 지나 모든 것을 정리하는 10분짜리 대곡 ‘타협의 비’까지 듣고 나면 이 한 시대를 풍미한 명반의 감상은 끝난다.

아쉬운 점은 이런 엄청난 음반을 만들어낸 노이즈가든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1990년대, 잠깐 찾아온 한국 대중음악 음지의 르네상스는 노이즈가든으로부터 촉발됐지만 그들이 이 음반의 연장선상에 있는 2집 음반을 99년 발표한 이후로 희미해져 갔다. 노이즈가든이 세운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밴드가 없다는 점 역시 그들의 독창성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 전체를 생각할 때 비극적인 일이기도 하다.


◇노이즈가든 프로필

·결성 : 1993년

·구성원 : 박건(보컬) 윤병주(기타) 이상문(베이스) 박경원(드럼)

·주요활동

-1996년 1집 ‘nOiZeGaRdEn’

-1999년 2집 ‘But Not Least’

〈조원희|음악평론가〉
[대중음악 100대 명반]26위 노 브레인(No Brain) ‘청년 폭도맹진가’
입력: 2007년 11월 22일 09:15:39
노브레인의 최고작을 꼽으라면 두말없이 이 앨범을 골라야 한다. 한국 펑크가 낳은 공전절후의 명반을 꼽으라 해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단 한 장을 꼽으라면 역시 이 앨범을 집을 수밖에 없다. 노 브레인의 데뷔작 ‘청년폭도맹진가’는 그런 앨범이다.

사진 왼쪽부터 정재환, 차승우, 이성우, 황현성
노 브레인은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 강남권에서 기타 신동 소리를 들었던 차승우를 중심으로, 마산에서 혈혈단신 상경한 이성우가 만나 결성한 밴드다. 초기에는 3코드 펑크를 시도했던 그들은 차츰 스카 펑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위퍼와의 조인트 앨범이었던 ‘Our Nation 2’, 차승우 군입대 전 제작했던 EP ‘청춘 98’을 통해 스카 펑크와 트로트를 결합한 ‘조선 펑크’라는 특유의 스타일로 발전해간다. 차승우가 제대한 2000년 발표한 이 앨범을 통해 노 브레인의 조선 펑크는 완성됐다. 그리고 한국 펑크가 정점에 올랐던 순간이었다. ‘청년폭도맹진가’는 노 브레인을 크라잉 넛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 펑크의 맹주로 올려놓았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펑크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연주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며 작곡 실력도 형편없는 아마추어 음악이었다. 그러나 ‘청년폭도맹진가’에서 노 브레인은 그런 선입견을 단숨에 부숴버렸다. ‘날이 저문다’의 위악적 외침부터 ‘청춘은 불꽃이어라’의 구수한 스윙에 이르기까지, 노래의 방향이 요구하는 지점을 다채로운 목소리로 소화해내는 이성우는 홍대 펑크의 아이콘이 될 만한 자격을 충분히 수행했다. 지미 헨드릭스를 카피하며 음악을 시작했던 차승우는 단순한 ‘배킹’에서부터 ‘필로 충만한 애드리브’까지, 모든 곳에서 발군의 기타 실력을 선보인다. 20대 초반다운 혈기와 20대 초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관록이 동시에 빛난다.

그러나 이 앨범의 의미는 연주나 사운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청년폭도맹진가’는 한국 인디 신에서 최초로, 그리고 민중가요 진영 바깥에서 처음으로 배태된 메시지와 음악이 일체가 된 작품이다. ‘청년폭도맹진가’ ‘십대정치’ 같은 노래에서는 어느 민가보다 직설적이고 서슬퍼런 저항정신이 피를 튀긴다. ‘98년 서울’은 초기 인디 신에 모여들었던 먹물들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잡놈 패거리’ ‘성난 젊음’은 당시의 라이브 클럽에 모이던 펑크 키드들을 향한 연대의 선언이다. 하루아침에 집이 철거당한 차승우의 고등학교 친구를 위해 만들었던 ‘이 땅 어디엔들’은 음악과 메시지가 만나 이뤄지는 감동의 결정판이다. “세상이란 언제나 가진 자들의 편에 서있더군”이란 가사에 이어 나오는 ‘아, 대한민국’의 멜로디는 아이러니를 자아내며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 앨범은 교실에서, 거리에서, 군대에서, 병원에서 만들어졌다. 군대에서 본 독립군가 악보에서 영감을 받았던 ‘청년폭도맹진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작곡한 ‘성난 젊음’ 등이 그런 노래다. ‘잡놈패거리’ ‘98년 서울’ ‘십대정치’ 등은 밴드 결성 초기의 대표곡이다. 요란한 차림에 늘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받아야 했던 경험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이념과 학습이 아닌, 삶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래들이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잡놈들의 송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이 아니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나올 수 없는 음악이었다. 보편성과 지역성이 완벽하게 녹아든, 참된 의미에서의 한국적 록은 이 앨범을 통해 몇 단계 진화하는 데 성공했다.

두번째 앨범 ‘비바! 노 브레인’을 끝으로 밴드의 리더이자 브레인이었던 차승우는 탈퇴했다. 지금 노 브레인은 ‘넌 내게 반했어’로 록 스타가 됐다. 그러나 “우리는 잡놈 패거리”라고 선언하며 “다 죽여버려!”라고 선동하던 100%의 펑크밴드는 사라졌다. ‘청년폭도맹진가’는 쇼 비즈니스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던, 그러나 그 일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던 펑크 복서의 기록지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그렇게 멋진 밴드가 없었다.

◇노 브레인 프로필

·결성 : 1996년

·구성원 : (1집 당시) 차승우(기타) 이성우(보컬) 정재환(베이스) 황현성(드럼), (현재) 이성우(보컬) 정재환(베이스) 황현성(드럼) 정민준(기타)

·주요활동

-97년 옴니버스 ‘Our Nation’ 2집 (그룹 ‘위퍼’와 함께)

-99년 싱글 ‘청춘구십팔’

-2000년 1집 ‘청년폭도맹진가’

-2001년 트리뷰트 음반 ‘Never Mind the Sex Pistols Here’s the No Brain’

-2001년 2집 ‘Viva Nobrain’

-2002년 붉은악마 공식 응원가 앨범 2002 ‘with you’ 참여

차승우 탈퇴

-2003년 3집 ‘안녕, mary poppins’

-2003년 3.5집 ‘Stand up Again: 넌 내게 반했어’

-2005년 4집 ‘BOYS, BE AMBITIOUS’

-2006년 디지털 싱글 ‘소리쳐라 대한민국’

-2007년 5집 ‘그것이 젊음’

〈김작가|음악평론가〉
[대중음악 100대 명반]25위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입력: 2007년 11월 22일 09:15:53
음악사적으로 보면, 1968년 한대수 이래의 모던포크는 장르로서의 중요성보다 ‘음악창작에 대한 인식’과 ‘메시지 표현 양식’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킨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즉, 대중음악에서 아티스트의 탄생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들이 대중음악 영역에 정식으로 들어옴으로써 대중음악을 단순한 ‘딴따라판’ 이상으로 자리매김시켰으며, 70년대 초반 청년문화의 중심으로 대중음악을 편입시켰다. 60년대 영미권의 록과 포크를 들었던 당시 대학생들에게 모던포크는 낯설지 않은 음악 형태였을 뿐만 아니라 자의식 강한 그들이 한국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날릴 수 있는 매개체로서도 적당했다. 왜냐하면 선동적인 록과 달리 포크는 기본적으로 ‘메시지’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박정희 정권의 ‘청년문화 탄압’에 따라 모던포크는 기운을 잃어갔고, 한대수·김민기를 비롯한 중요한 창작자들이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히면서 더 이상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그 마지막은 한대수가 2집 ‘고무신’을 발표했던 75년 무렵이다.

이후 모던포크의 계보는 오히려 대중음악이 아니라 70년대 말의 ‘메아리’와 같은 대학 노래동아리로 이어진다. 메아리는 단순히 실연 중심의 노래패가 아니라 ‘창작자 집단’이란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메아리 이후로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곳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모던포크가 대학 내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무신’ 이후 모던포크의 계보는 민중음악 진영 내의 메아리-노래를 찾는 사람들-새벽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고, 예외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정태춘, 조동진, 김두수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90년대에 들어 ‘모던포크’의 적자임을 자부한 이가 김광석이고, 그 핵심적인 작품이 바로 김광석 4집(94)과 ‘다시 부르기 2’였다.

김광석은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88년 동물원 1집을 정식 데뷔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동물원 2집까지 참여를 하고, 89년 솔로 데뷔작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은 것은 ‘나의 노래’가 담긴 92년 3집부터다. 베스트앨범 형식으로 발표한 ‘다시 부르기 1’(93)부터는 작품성과 상업성 둘 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시 부르기 1’이 동물원과 자신의 앨범에서 뽑아낸 노래들과 한때 활동하던 민중음악 진영에서 김현성, 한동헌, 문대현의 노래로 구성된 자전적 베스트 앨범이었던 반면, ‘다시 부르기 2’는 자신이 스스로 선정한 ‘한국 모던포크의 대표곡’ 모음집이다. 그리고 모던포크를 떠나서 그가 선정한 중요한 음악창작자들에 대한 트리뷰트앨범이었다.

그래서 이 음반에는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와 같은 초기 모던포크 뮤지션들의 노래가 담겼고, 백창우의 ‘내 사람이여’, 한동헌의 ‘나의 노래’와 같은 민중음악 선배들의 노래들이 있다. 또 김창기의 ‘잊혀지는 것’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 속의 친구’와 같은 당대 주목할 만한 창작자들의 노래들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앨범의 대미는 자신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로 끝맺는다.

대부분의 세션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동익 밴드가 맡아서 90년대 국내 세션의 정수를 보여주었고, 편곡자 조동익은 원곡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노래를 참신한 김광석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리메이크 앨범으로서는 드물게 대다수 수록곡이 원곡을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했고, 이는 자신의 노래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노래와 삶, 기쁨과 슬픔 그리고 자유와 외로움이 진득하게 녹아든 이 음반은 그의 유작이라서 더욱 애틋하다.

◇김광석 프로필

·출생 : 1964년

·사망 : 96년

·데뷔 : 84년(김민기 ‘개똥이’ 음반 참여 및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주요활동

-88년 동물원 1집 ‘동물원’

동물원 2집 ‘동물원 두번째 노래모음’

-89년 김광석 1집 ‘김광석 1’

-91년 김광석 2집 ‘김광석 2nd’

-92년 김광석 3집 ‘김광석 3번째 노래모음’

-93년 ‘김광석 다시부르기 1’

-94년 김광석 4집 ‘김광석 네번째’

-95년 ‘김광석 다시부르기 2’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gaseu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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