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문화는 베트남전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됐다. 기존의 관념과 가치관에 대항하던 히피문화는 ‘청년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유입되며 큰 사회적 변혁을 몰고 왔다. 무명에 불과했던 신중현이 ‘펄시스터즈’를 발판으로 ‘신중현사단’이라는 철옹성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68년이다. 그해 트윈폴리오와 더불어 미국에서 건너온 한 장발 청년은 한국 포크사에 이정표를 제공했다.

바로 ‘한국 모던 포크의 개척자’ 한대수의 등장이다. 그는 외국 히트 팝의 번안곡 부르기에 급급했던 당시 대중음악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귀국 첫 무대는 TBC TV PD 이백천의 주선으로 출연한 ‘명랑백화점’. 당시 TV에 나온 그의 모습은 자신의 어머니조차 부끄러워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온통 장발의 그가 여자냐 남자냐며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했다. ‘주간 중앙’은 ‘최초의 히피, 한국에 등장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곧 ‘우리나라를 떠나라’는 비난여론까지 비등했다. 당시 아무도 그가 진지하게 세상의 고민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임을 알지 못했다. 69년 9월 두 여대생의 도움으로 ‘옥이의 슬픔’ ‘행복의 나라로’ 같은 창작곡은 물론 톱으로 연주를 한 전위적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을 열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들쑤셔 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그의 공식무대 활동은 금지되었다. 음반발표는 언감생심, 서울과 지방의 대학가에서만 노래를 계속했다. 먹고 살기 위해 디자인포장센터에 취업했지만 날벼락 같은 입대영장이 날아와 3년간 해군 수병으로 복무하며 완전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74년 제대 후 그는 가수가 아닌 김민기의 ‘바람과 나’,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 작곡가로 변해 있었다.

국내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6년 만인 74년에야 1집이 만들어졌다. 김진성의 주선으로 신세계레코드를 통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음반작업에 필요한 시간은 8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포크가수 방의경의 기타를 빌려 드럼 권용남, 베이스 조경수, 첼로 최동휘, 피아노와 플루트 정성조의 탄탄한 라인업과 4트랙 동시녹음을 했다. 우선 파격적인 앨범 재킷이 압권이었다. 사진작가인 자신이 촬영한, 거친 입자의 흑백사진 속의 자화상이 삐딱하게 클로즈업되어 있는 이미지는 강렬했다. 앨범사진과 타이틀곡은 자신이 걸어야 될 험난한 길에 대한 예고였다.

총 8곡의 수록곡 중 소홀히 넘길 곡은 단 한곡도 없다. 불협화음의 연속인 ‘물 좀 주소’는 한대수가 연주하는 생소한 카주(전자 풀피리소리의 느낌) 소리와 함께 자유와 사랑을 타는 목마름으로 호소했지만 끝내 탄압과 금지라는 현실에 절망하는 절규의 목소리가 되었다. 김민기가 먼저 취입한 ‘바람과 나’의 한대수 버전은 정겨운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서정적인 포크 질감을 선보였다. ‘옥이의 슬픔’에서 정성조의 격조 있는 플루트 선율과 투박한 한대수의 경상도 억양이 빚어내는 소리의 향연도 들을 거리다. 17세 때 만든 ‘행복의 나라’는 한국 대표 포크송이 되었다. 가수의 대표곡은 인생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그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마음껏 음악활동을 하며 자식까지 낳으며 행복의 나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최규성|대중문화평론가〉

-자유와 사랑에 대한 타는 목마름 호소-

한대수의 1집 ‘멀고먼-길’은 1974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발표되었다. 이 앨범에는 지금까지도 불리는 그의 대표곡 ‘물 좀 주소’ ‘바람과 나’ ‘행복의 나라’가 수록되었다. 그는 2집 ‘고무신’(1975)을 발표하고 미국 뉴욕으로 음악적 망명을 한 후 하드록밴드 ‘징기스칸’ 활동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다 89년에 잠시 귀국해서 그의 최고 앨범이라 할 수 있는 ‘무한대’를 발표한다. 이 음반은 14년의 공백을 깨고 포크에서 록으로 방향을 전환해 만든 명작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새로운 음악을 인정해주지 않자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이전과 달리 이때부터는 음악창작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음반들이 ‘기억상실’(90), ‘천사들의 담화’(91)이고 여기에는 잭리(이우진)와 이우창 형제가 참여한다.

6집 ‘1975 고무신 서울~1997 후쿠오카 라이브’(99)는 국내에서 한대수가 재평가받으면서 나온 앨범. 같은 해에는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가 발표되었다. 음악적으로 새로운 분기점이 되는 8집 ‘Eternal Sorrow’(2000)가 손무현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이 음반은 후기 한대수의 대표작이 된다. 그리고 2002년에 김도균밴드, 이우창의 독집 앨범들과 함께 묶여 발매된 ‘삼총사’에는 ‘고민 Source Of Trouble’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As Forever’와 같은 멜로딕한 노래부터 ‘호치민’과 같은 광폭한 노래들까지 함께 실렸다. 2004년에는 10집 ‘상처’가 발표되었다. 이후 2001년에 가졌던 ‘마지막 콘서트’를 담은 ‘2001 Live’(2005)가 나왔음에도 12집 ‘욕망 Urge’(2006)가 어김없이 나왔고, 같은 해에는 도올 김용옥과의 합동 콘서트를 담은 ‘한대수 도올 광주라이브’를 발표했다. 한대수의 디스코그라피에서 주목하지 않을 음반은 하나도 없다.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gaseum.co.kr〉

+ Recent posts